벽돌나비

Wall · Rock · Flood · Oneself


임선구


2022.11.29(화) - 12.23(금)





마주치는 세계와 접히는 이야기들


최희승 (두산갤러리 큐레이터)

마치 그에게는 연필의 검은색 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임선구는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제작했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경우, 표면에 색을 입히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작품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연필의 다채로운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 검기도, 희기도, 새벽녘처럼 뿌옇기도 한 그의 종이는 최근  두드러지는 변화의 과정을 겪어내고 있다. 임선구는 그림의 지지체로서 또는 콜라주의 재료로서 존재하는 종이의 한계를 시험해 보겠다는 듯, 이미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찢거나 구기고, 반대로 조각 내 붙인 뒤 그려내어 솟아나는 표면과 교차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벽과 돌과 비

목재틀에 종이, 흑연, 철사 및 혼합재료, 콜라주, 101 x 94.5cm, 2022 

드로잉 룸에서 열리는 그의 네 번째 개인전 ≪벽돌나비≫는 이러한 임선구 작업의 흐름을 파악한다면 더욱 가까이 이해할 수 있는데, 주로 평평한 종이에 밀도 높은 그림을 그리던 그는 이후 자신의 도상들을 커다랗게 확대하여 사람이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스케일의 설치 작업을 보여주었다.1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평면과 입체 두 형식의 합의점을 찾은 듯한 반입체 형태의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다.

벽과 돌과  나와 비

목재틀에 종이, 흑연 및 혼합재료, 콜라주, 96.5 x 145.5cm, 2022 

이처럼 종이가 평안히 머물러 있지 않고 겹치거나 접히고, 구겨지는 일이 현재의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빠르게 내리기 전에 임선구의 그림을 차분하게 들여다보자. 자신의 그림을 거대한 무덤이라 표현하기도 했던 그의 작품은 산속에서 만나는 이슬 맺힌 어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2 삐뚤빼뚤하고 날선 풀과 나무들, 불안한 표정의 인물들과 부엉이, 시작과 끝을 모를 숲과 건물들, 좁게 이어지는 까만 강과 밤길 등의 이미지가 반복해서 화면에 등장한다. 연필이 지닌 특유의 깊은 회색과 얇은 선들이 모여서 이루는 표면이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돌과 나와 벽

목재틀에 종이, 흑연 및 혼합재료, 콜라주, 73 x 117cm, 2022 

동화적이기도, 언젠가 겪었던 과거 같기도 한 그림 속 세상에서 작가는 신과 같이 다리를 놓았다가 이내 부수고, 끊임없이 돌산을 올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계곡을 만든다. 가족을 잔뜩 태우고 간신히 굴러가는 자동차가 길 끝에서 결국 낭떠러지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림 밖 현실에서는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종이를 이리저리 다루는 일은 임선구가 몰두한 자기 안의 세계를 마음껏 쌓고 지었다가 죄책감 없이 허물어뜨릴 수 있는 가장 익숙하고 적합한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오므려 쥔 땅 1

종이, 흑연 및 혼합재료, 콜라주, 29.5 x 36cm, 2022 

앞서 어둠이라고 밝힌 말은 죽음이라는 말과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임선구의 그림은 가깝게 경험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을 마주한 현실과 상상의 사후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림 속의 나비를 비롯한 작고 가벼운 생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죽음 이후의 세상을 잇는 영매의 역할을, 3 직사각형, 오각형, 타원형 등 비정형적인 모양의 벽돌은 그 자체로 그림 안팎의 경계를 만드는 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흙 입자가 무수히 모여 단단한 물체가 되고, 그것이 다시 집을 짓는 단위가 되는 벽돌의 성질이 그림의 빈 곳으로 쌓여 밀도를 부여하거나 이야기를 종이 위에 차곡차곡 건설하는 작가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작가의 단상으로부터 출발한 흑연 입자들은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종이 뭉치같이 부풀어진 몸과 무게를 입는다.

) 벽과 유령, 종이에 흑연, 혼합재료, 콜라주, 54.5 x 79cm, 2022 

아래) 유령과 벽, 종이에 흑연, 혼합재료, 콜라주, 56 x 80cm, 2022 

그의 그림은 이러한 장면들을 계속해서 끄집어내고 눈으로, 손으로 확인하는 과정과도 같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임선구의 그림에서 자주 나타나는 소재인 벽돌과 나비를 등불 삼아 우리는 언젠가 마주할 죽음의 덩어리진 불안과 그 위를 흰 점처럼 날아가는 초연함이 마주치는 작가의 태도를 바라볼 수 있다.




1. 임선구는 그간 갤러리 조선 ≪종이 위의 검은 모래≫(2019), 학고재 디자인 스페이스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2020), 세마 창고 ≪보이지도않는꽃이: 발자국을 발견하기 (2022)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특히 올해 여름의 개인전에서는 세마 창고 특유의 공간을 그림의 배경처럼 대하며 관람객이 직접 밟고 올라가 관람할 수 있는 구조물을 비롯하여 거대한 종이 드로잉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2. 임선구 작가 노트

3. 작가 노트의 한 구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남자의 곁을 홀연히 날아가는 흰 나비를 발견한다. “나는 산 속에 있던 크고 무서운 나무를 생각했다. 그 나무는 두 방향으로 길게 갈라져서 사람이 땅 속에 거꾸로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다음엔 나무에 목을 매단 남자를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자기 생을 끊어낸 몸은 비닐처럼 하늘거리며 흙 속에 스며들었다. 젖은 풀 주변을 하얀 나비가 맴돈다. 그 하얀 점을 잡으러 뛰어온 아이들 덕분에 사방이 어둠으로 잠긴 묘혈은 자꾸만 들썩였다. (후략)”, 숨은 산, 2020, 33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