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der


배준현·이수진


2023.06.07(수) - 06.30(금)


Scenes

안민혜 독립기획자


#1. 보는 사람

대비가 강한 빛과 그림자의 표현, 사선으로 길게 뻗은 구도, 구불거리는 묘사와 긴장감이 깃든 동세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대상에게서 공포의 정서를 감지하도록 한다. 그중 가장 큰 두려움은 숨겨진 맥락, 즉 시간이나 공간, 또는 정보의 삭제로부터 온다. 그림에는 움직임의 결과만(열린 약병, 테이블 위에 놓인 돋보기) 등장할 뿐 그것의 주체가 그려지지 않았거나, 또는 신체의 일부(손) 만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그 움직임의 주체가 인간인지 유령인지, 실체를 알 수 없도록 함으로써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불안의 근원적인 실체가 없음, 그리고 그 비어있음 자체로 공포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것은 영화적 작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그림들에는 회화이기에 더해질 수 있는 작가만의 또 다른 장치가 있다. 바로 강박적인 ‘단정함’이다. 지나치게 정돈된 붓질과 표현은 히스테리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내적인 공포감이 관람객에게 전이되도록 한다.

이수진 

하루 세 번

2023 

Oil on linen 

31.8x40.9

이수진 

햇빛 충전

2023 

Oil on linen 

17.9x25.8

하지만 이 그림들이 정말 흥미롭게 다가오는 순간은 그러한 긴장들이 전이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이 대상들이 작가에 의해 철저하게 컨트롤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다. 앞 단락의 말들을 작가의 시선에서 다시 기술하자면; 그림 속의 장면들은 실체 없는 이미지가 아닌, 레퍼런스가 분명한 장면이고, 지나치지 않을 만큼의 구도와 색감, 부드럽고 단정한 묘사로,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는 크기의 작은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작가에 의해 완벽하게 컨트롤되어 있다는 사실은 혹시라도 남았을 불안의 형태와 출처 모두를 파악 가능하도록 한다. 이것들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마치 공포영화의 연출 작법이 모두 노출되었을 때, 어떤 것도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와 유사하다.

그것이 우리를 위협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될 때 그림은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죽음과 재난의 이미지를 강박적으로 반복하여 제작했던 앤디 워홀처럼, 작가가 대상이 갖고 있는 위험을 지속적으로 자신의 시각 아래 두고, 그것을 컨트롤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보이는 유령 – 실체 없는 공포 - 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기를 반복한다. 그것들을 다듬고 또 다듬어 가면서. 그리고 이 추측은 다시 또 다른 종류의 오싹함으로 이어진다. 그 공포는 이제 회화의 어떤 장치 때문이 아닌, 한 예술가의 히스테리적인 그리기 행위로부터, 그리고 그가 ‘유령’을 본다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온다.

이수진 

지나간 일

2023 

Oil on linen 

37.9x45.5

#2. 보여지는 사람

그림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앞을 (또는 진실을) 보지 못하기에 어딘가에서 헤매거나, 동굴 안에서 더듬고 있고, 또는 이도저도 못 한 채 멈춰있다. 그림에 표현된 여러 은유는 이 인물이 아마도 작가 본인일 것이라는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또는 앞을 보지 못하고 이 세계 안에서 방황하는 사람, 즉 작가 본인이면서 우리이자, 주변의 누군가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보지 못함’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화상 속 인물들은 보통 정면을 응시하며 그림 바깥의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기 마련인데, 이 그림 속의 인물은 마치 보여지기 위해 자신의 시선을 삭제한 듯 보인다.

그림은 대체로 복잡한 액자식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거친 붓질과 어둡고 채도가 높지 않은 색감을 갖고 있다. 또한 화면을 가득 채운 배경 안에는 많은 회화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이 그림은 볼 것이 – 또는 그려진 것이 – 많다. 이 요소들은 장면의 맥락을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하는 작가의 제스쳐로 보이기도 하는데, 간혹 어떤 것은 장황해 보이기까지 하다. 풍부한 색감과 터치, 홀로 걸어가는 인물의 모습만으로도 어떠한 정서를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작가는 왜 은유와 비유로 가득 찬 우화적인 이야기를 화면 가득 담고, 복잡한 구도를 취하며, 그것도 모자라 텍스트를 삽입하기까지 하면서 많은 설명을 덧붙여야 했을까? 어쩌면 이것은 앞서 말한 ‘응시’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의 우화적 설명은 작가의 ‘불안’의 표출로, 그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은 그 불안의 해소에 대한 갈망, 즉 초월적 대상을 향한 ‘응시’의 요청이기도 한 것이다.

배준현 

시도 

2023

Oil on linen 

90.9x72.7

설명으로 가득 찬 그림은 불분명한 인과관계들을 명확한 하나의 서사로 환원시켜 ‘알 수 없음’의 불안을 낮춘다. 그리고 작가가 그림 속에 드러내는 자조와 유머 – 그림 속 인물은 모르고 있지만 작가는 그 모름을 알아차리고 있는 이중 자아를 드러내며, 그것을 자조하거나, 인물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 역시 그림이 가진 긴장감을 깨트리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이중 구도로 거리감을 가중시켜 제삼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유머로 긴장을 낮추는 것은 알 수 없음으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다스리는 작가의 방법인 것이다. ‘응시’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절대자의 메타포, 또는 ‘어머니의 응시’로서, 과도할 때는 억압이 되기도 하지만 부재할 때는 불안의 원인이 되어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 ‘보지 못함’의 불안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또는 현실을 보는 눈을 감고 진실을 보고자 ‘응시’를 호출한다.

이수진 

신경 쓰이는 일

2023 

Oil on linen 

60.6x72.7

배준현 

애매한 계시

2023

Oil on linen 

145.5x89.4

#3. Wonder

이수진의 <신경 쓰이는 일>은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그리고 배준현의 <애매한 계시>는 작가가 그림 속 대상이 자신을 바라보도록 허락한 전시의 유일한 그림들인데, 여기서 두 사람은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람’이라는 서로의 태도를 뒤바꾼다. <신경 쓰이는 일>은 영화 <식스센스>에서 소년이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는 비밀을 털어놓게 되는 장면을 작가가 다시 다듬어 그려낸 것이다. 이 순간에도 작가는 이미지가 자신을 위협하지 않도록 자신의 시선 아래에 두고 있지만, ‘불안’이라는 유령이 자신과 늘 함께 있음을 암시하며 본인의 모습을 투사한다. <애매한 계시>에서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존재를 화면 안으로 가져오며, 그것이 길을 제시하는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작가는 이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로, (최종의 그림에는 지워진 듯하지만) 자신의 반려견 ‘봉고’를 한 구석에 그려 넣거나, 어떤 ‘계시’의 텍스트를 그림 안에 넣어 공포를 온전히 전하는 대신, 너스레 같은 농담으로 긴장을 완화시킨다.

배준현 

오해 

2023

Oil on linen 

53x53

배준현 

Night observer

2023

Oil on linen 

65.1x53

결여된 존재인 인간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불안은 실체 없는 유령 같은 것으로부터 찾아오는 것이기에 결코 해소되지 않은 채 늘 우리 곁에 있다. 아마도 그것에 적당히 방어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정도가 인간이 자기 삶 안에서 해결해 낼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명의 작가가 그것을 자신의 작품 안에서, 또는 그리기의 행위 안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예술’이 인간의 삶에 밀착하여 어떻게, 무엇을 작동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결핍은 저 너머에 있을 진실을 향한 욕망으로, 예술은 그 진실을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수단으로 함께하며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결핍된 인간의 삶 – 해소되지 않는 ‘불안’의 삶 안에는 늘 ‘예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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