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castle Play


양정화


2023.04.14(금) - 05.13(토)


드로잉룸과 에이라운지는 2023년 4월 14일(금)부터 5월 13일(토)까지 양정화 개인전 《Sandcastle Play》를 공동기획·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삶과 죽음의 양가적 요소를 추상과 구상 작업으로 활동해온 양정화 작가의 신작들로 구성되며, 생명과 사물이라는 상반된 주제를 두개의 다른 공간에서 각각 설치와 평면 작업으로 펼쳐냅니다.

에이라운지에서는 감각과 현재를 퍼포먼스 드로잉 형식으로 제작한 대형 설치 드로잉 〈Untitled Record〉를, 드로잉룸은 곡선과 직선/면과 선의 양가적 요소들을 흑연으로 작업한 회화 작품을 선보입니다. 작가는 순환하는 우리 삶의 이야기를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 비유하여 관객들에게 그 사이의 여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Study of Heart

2023

gouache, graphite, charcoal, conte on canvas

145.5x112.1cm


사(死)의 향유 – 양정화의 모래성 쌓기

구나연(미술비평가)


마르셀 뒤샹의 묘비명은 “그리고, 죽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다”(Besides, it's always the others who die)이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면서도 살아서는 체험할 수 없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미래이며, 나의 죽음은 과거나 현재의 시제로 논의하지 못한다. 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의 ‘기억’은 죽음에 대한 경험이 아닌 그에 대한 의식에 관한 것으로, 죽음은 삶을 통해야만 이야기된다. 그리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저마다의 이유 중에서 양정화의 작업은 이에 관한 오랜 사유의 결과이며, 따라서 그에게 죽음은 곧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질문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늘 불충분한 조건 속에서 답변을 찾는 일이지만, 그의 회화는 이 필연적인 불충분 그대로를 삶이 포섭할 때 나타나는 어떤 생성과 관련된다.

Study of Skull

2023

gouache, graphite on canvas

130.3x97cm

먼저 양정화가 이번 《Sandcastle Play》 전에서 보여주는 것은 미술사에서 죽음의 알레고리로 가장 널리 쓰인 해골이다. 〈Study of Skull〉 연작에서 해골은 칠흑의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자리하거나, 수없이 풀어졌다 다시 엉키며 여러 해골의 잔상이 겹치기도 한다. 제목에 등장하는 ‘연구’(study)라는 말이 함축하듯, 그가 회화로 접근하는 해골은 죽음에 대한 경고도, 교훈도, 고통도 아니며, 생의 커다란 화두인 죽음이 그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반추해 가는 양태이다. 죽음을 모티브로 하여 벌이는 이 냉정한 회화적 실험에서, 해골과 함께 등장하는 심장 역시 양정화가 수년 전부터 몰입했던 주제이다. 〈Study of Heart〉 연작에서 심장은 셀 수 없이 오고 간 다양한 필선을 통해 현현하기도, 캔버스 위에 피어나듯이 자리하기도 한다. 전시장에서 해골과 나란히 서로 대구를 이루며 공존하는 심장은 그의 화면 위에서 지금 우리가 숨 쉬는 호흡의 메타포와 같이 박동한다. 이렇게 해골과 심장의 연작은 삶과 죽음의 대립이라는 뚜렷한 경계를 흐리게 할 때 경험할 수 있는 화해와 고양을 품고 있다.

Study of Heart

2023

gouache, graphite, charcoal, conte on canvas

72.7x60.6cm

이는 회화적 행위의 서사와 삶의 형상을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회화적 행위란 그리기를 넘어 캔버스 안을 종횡하며 작가가 겪은 현실의 삶을 쏟아내고 견디는 과정을 말한다. 팽팽하게 펼쳐진 새하얀 캔버스 위를 검은 선과 면으로 침투해야만 드러나는 변화무쌍한 상태는 한 사람의 삶과 외부 세계가 긁히고 교차하며 생기는 무수한 모순과 상처와 같다. 결국 삶과 나의 불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고, 변화하며, 살아가기를 재촉하는 동력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양정화는 이 동력으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누구나의 명료한 귀결과 소멸을 곧 삶 자체의 포용으로 변화시킨다. 죽음의 상태를 섣불리 모면과 외면으로 망각하기보다 어떻게 직면하고 조응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맹렬한 실험은 죽음의 알레고리를 회화의 형식적 문제로 확장하는 것과 더불어 스스로 몸과 살에 이를 밀착시키는 것에서 비롯된다.

양정화의 작업 방식은 목탄, 콩테, 과슈와 같은 탄화된 재료와 화면을 손으로 문지르며 만들어내는 깊고 검은 색채의 중첩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회화는 그의 몸과 일체가 되지만 화면을 직접 문지르는 지난한 반복에 의해 손에는 상처가 나고 아물고 다시 상흔이 남게 된다. 그러나 이 상처는 곧 손으로 자신의 회화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행위에 다름 아니며, 이것을 견딘 후에 나타나는 형상의 현시는 되찾아진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그가 〈Untitled Part〉에서 자신의 몸 일부를 석고로 캐스팅 하여 변형시키는 것은 한 사람의 신체가 끊임없이 사물화 되는 소멸과 생성의 리듬과 맞닿아 있다. 소조는 실체를 떠서 껍데기를 떼어내고, 또한 그 껍데기에서 또다른 형상이 출현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탈피’라고 할 수 있는 입체물의 형상은 육체를 지나 즉물적 상태로 서지만, 이같은 변모야 말로 삶의 속성이면서 또한 죽음의 그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골과 심장, 신체와 조각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사와 간극의 틈에는 생과 사에 대한 환유가 존재하며, 이는 양정화가 모든 감각의 총체로 대면해 온 극복의 사유일 것이다.

Untitled Part(Hand)

2023

plaster, charcoal, sculpt after life casting

15x8x12cm

Untitled Part(Hand)

2023

plaster, charcoal, sculpt after life casting

18.5x7x4.8cm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죽음의 모티브와 함께 회화 공간의 형식적 실험성 또한 뚜렷이 드러난다. 그의 작업 세계가 어떤 변화의 국면에 들어섰음은 점, 선, 면과 같은 회화의 근본적인 요소와 주관성이 융화되는 방식과 그 구성적 변용을 재고한 결과로 분명해진다. 예컨대 〈Study of Skull〉, 〈Study of Heart〉 연작에서 해골과 심장의 형상으로부터 독해한 면과 선의 유기적 결합과 구축은 공간에 여러 차원의 주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완고한 면(面)적 구축은 또다른 연작 일부에서는 유연한 선(線)으로 하염없이 흔들리며 해체된다. 이렇게 상반된 회화의 작용들은 모두 형상의 재현적 측면에서 점차 멀어지며 해골이나 심장의 도상학적 차원을 떠나 복원되는 생의 원초성을 지닌다. 생과 사의 관습적 도식에서 벗어날 때 고조되는 이 회화적 향유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에서 해방된 형태가 되어 심장의 혈관으로 흐르고, 해골의 눈으로 빛을 발한다.

더욱이 이번 전시에서 양정화는 10미터에 달하는 스케일의 목탄 드로잉을 제작한다. 작가의 개인적 삶은 물론 우리의 삶이 지니게 마련인 종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는 거침없이 행위 할 때, 또 자신을 신뢰할 때 가능할지 모른다. 거대하게 펼쳐진 드로잉은 회화에 대한 자율성을 유영한 결과이며, 예측 불가한 상태로 몸을 움직인 흔적과 변수를 실존의 유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회화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사유와 행위의 심연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한강의 시 「심장이라는 사물」에 등장하는 다음의 싯구처럼 양정화의 신체는 불가해한 회화의 장소 속에 잠행되어 있다.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 지워지기 전에 이미 / 비워진 사이들 /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 어깨를 안으로 말고 / 허리를 접고 /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1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양정화는 회화라는 “그런 곳에” 들어가는 행위로써 자신을 더 많이 노출한다. 그의 필선들은 작품들 사이에서 끝없이 저질러지고 수습되고, 깨어지고 메우기를 거듭하여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난 뒤의 확고한 파격을 이루어낸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침잠한 그의 검은 색은 한결같이 눈을 감고 내부로 시선을 옮길 때에 보이는 것으로 안내한다. 그는 작업 노트에서 “... 기억과 망각의 변주는 그리고 지우고 또 덧그리면서 계속 변형하는, 또는 무의식적으로 변형되는 형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나의 심리를 자극하는 이미지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소환되는 기억의 정체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시작은 끝일 수 있고 끝은 시작일 수 있다”고 말한다. 수동적 탄생과 능동적 죽음이 삶으로 실현 가능한 범주의 양 끝을 말아 쥐고 수축과 이완을 계속할 때, 우리는 그 위에서 어느 틈에 사라질 모래성을 쌓는다. 그리고 이 무모는 현재를 지속의 선상에 놓아 줄 부조리한 힘으로 빚어진다.

Study of Skull

2023

gouache, graphite on canvas

90.9x72.7cm

나의 바깥인 타인과 세계는 알 수도 없고 어쩔 수도 없는 고난을 부여하며 관계를 잇거나 분지른다. 또한 죽음은 이탈이나 상실 혹은 두려움이나 무서움 같은 것으로 생의 끝자락에 단단한 매듭을 묶는다. 그러나 양정화가 “시작은 끝일 수 있고 끝은 시작일 수 있다”고 말한 것 같이, 죽음이란 매듭을 푸는 불멸은 나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위태롭게 이어지는 관계에 의해 실현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산 자가 죽은 자를 전유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객체적 불멸성이라 불리는 이것은 살아 있는 직접성을 잃어버린 존재자는 다른 생성의 살아 있는 직접성에 실재적 구성요소가 되고, 이로써 결국 세계의 창조적 전진(Creative advance of the world)을 가져오게 된다.2 양정화의 작업에서 외피가 모두 기화된 후 남은 뼈와 한없이 운동하며 부드러운 심장의 이질적 요소는 불순물을 제거한 생의 정수이면서,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는 역동의 형태이고, 곧 창조적 전진의 모습이다. 이 전진은 생으로 맞부딪히고 거리낌 없이 죽음을 대면하는 것을 동력으로 삼은 양정화의 화면 위에서 비로소 수렴된다. 그의 검은 단색이 만들어낸 놀랄 만큼의 다양한 세부와 견고한 층위에 집중하다 보면, 생의 보편과 죽음의 특수를 느끼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1.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심장이라는 사물」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20.

2. A. N.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제』, 오영환 옮김 (서울: 민음사), 1991;2005,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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