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소정, Untitled, 2022, acrylic and oil on canvas, 193.9×130.3cm 


양소정, Untitled, 2022, acrylic and oil on canvas, 193.9×130.3cm 


양소정, 깨진 물, 2023, oil on canvas, 97×193.9cm 


양소정, 폭발, 2023, oil on canvas, 90.9×65.1cm 


양소정, Untitled(사물모양), 2021, acrylic and oil on canvas,45.5x37.9cm

평면을 비스듬히 기울여


안소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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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것을 비스듬히 기울여 놓으면 그 안에 공간이 보인다. 두께 없는 평면처럼 중립적인 자리를 지키던 것이 어떤 기울기를 갖게 되면 그 내부로부터 무언가를 반사시키며 공간의 속사정을 드러내곤 한다. 양소정의 그림은 이러한 공간과 연루되어 있다.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보면, 평면과 임의의 공간 사이를 오가는 형태에 관해 환기시킨다. 대부분 “무제”로 이름 붙여진 그림들 가운데 “사물모양”이라는 괄호 안의 부제를 포함한 일련의 작업은, 평면과 임의의 공간을 규명하는 매개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실제 공간의 큰 벽을 지지체 삼아 사물의 모양을 재배열한 <폐곡선>(2023)은 이번 전시 《In My Mold》의 내막을 보다 구체화함으로써 “차원”에 관한 물음을 던져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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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본 것에 대하여 어떻게 글을 시작할까 며칠을 궁리했다. 그보다 앞서,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실에 갔을 때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차가운 회색 공간을 그려놓은 캔버스와 마주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다. 평평한 화면에 빈틈없이 꽉 맞게 설계해 놓은 미지의 회색 공간은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진공상태처럼 느껴질 만큼 아주 순간적으로 숨이 멎게 할 서늘함이 나의 피부인지 심장인지 눈인지 어떤 감각에 다가왔다가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봉인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그는 며칠이 지나 이 그림의 제목이 “깨진 물”이라는 것과 그것이 “물의 죽음”에 관한 기억에서 길어 올린 형상이라는 것을 내가 가늠할 수 있도록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마저 적어 보냈다. 

   잠시 중단했던 이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펼친 그는,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임의의 형상들에 한참 열중해 있던 터였다. <폐곡선>은 그러한 관찰과 사유와 상상을 오가며 도달한 이미지로서, 앞서 말한 대로 평면과 임의의 공간을 매개하는 “폐곡선”에 관한 회화적 실험으로 이어졌다. 나무 판의 얇은 두께를 가진 폐곡선의 형상들은 흰 벽 위에서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 유동적인 이미지와 결합해 있다. 일제히 사방으로 튀어올라 퍼져나가는 물줄기 같아 보이는 착시를 걷어내면, 평평한 흰 벽 위에 여러 폐곡선의 실체들이 뒤엉켜 하나의 화면 안에서 제 방식대로 공간을 점유하는 일렁임을 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것들은, 언 강이 녹으면서 단단하고 견고했던 얼음이 다시 물이 될 때와 벗겨놓은 채소 껍질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제 무게와 부피를 잃어버린 채 임의적인 형태로 소멸해 가고 있을 때,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리고 나면 그림이 되지 못한 물감의 파편들이 벽과 바닥에 떨어져 어떤 얼룩들을 만들어 놓았을 때, 그 한시적인 순간들 속에서 이렇다 할 제 몫의 자리 없는 것들로 목격된다. 양소정은 그렇게 존재를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사건 속에 들어서 버린 형상들을 붙잡아 임의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로 회화의 명분을 꾀한다. 

   <깨진 물>(2023)은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캔버스 모서리에 꽉 차게 그린 어떤 회색 공간 내부에 대한 내밀한 목격자로서 우리를 그림 앞에 세워 놓는다. 게다가 저 공간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호하기만 한 폐곡선의 이미지들이 회화의 표면에서 방금 일어난 파열처럼 한순간에 시점을 변환시키기도 한다. 그는 고인 물이 죽었을 때 물이 깨졌다는 표현을 쓴다며, 금붕어를 키우던 어항에서 물이 깨지는 것을 목격했던 자신의 기억 위에 일련의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형상들을 교차시켰다. 투명하고 유동적인 물의 죽음과 그때의 파열은, 역설적이게도 소멸의 진행 과정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어떤 형상을 끈질기게 붙잡아 두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마치 인간의 육체가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원형을 기억해내려는 추상적인 물질[몸, 뼈, 재, 흙]로의 변환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깨진 물> 안의 저 회색 공간은 죽은 이의 육체를 위한 (변환의) 자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말했다. “몸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폐곡선”이라고. [*작가노트 “몸”, 2021.6.1.]

   사물 형태에 관한 드로잉 연구와 회화적 표현에 몰두해 온 긴 시간을 지나 <폐곡선>에 이른 양소정의 회화는,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말하자면 (소멸을 향해) 변환하는 형상들을 위한 자리로서 “회화의 평면”과 “회화적 공간”을 환기시킨다. <Untitled(사물모양)>(2019-2022) 연작에서, 그는 허공에 가까운 텅 빈 배경 위에 마른 식물, 연기, 천, 얼룩 등을 정교한 붓질로 그려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각각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물의 모양에 주목하여, 그는 균일하게 칠해진 바탕 위에 부유하며 낙하하는 이 이중적인 움직임을 정지시켜 놓았다. 그가 아주 오래 전에 말한 대로, 그는 사물이 처한 현실의 부조리에는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그것들이 제 형상을 드러내며 견디고 있는 한 순간을 집중하여 보고자 했다. 그것이 유동하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윤곽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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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무조각 드로잉이라고 부르면서 사물의 형태 대로 또렷하게 윤곽선을 오린 <Untitled(사물모양)> (2022-2023) 연작은, 폐곡선 안에서 훨씬 적극적인 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캔버스 평면 위에, 중력도 원근감도 없이 네 개의 모서리가 구축한 평평한 회화의 공간 속에, 양소정은 천, 끈, 불, 연기, 그을음, 마른 식물, 뼈, 뿔, 가죽, 머리카락, 유리, 물 같이 허무하고 무기력한 사물의모양을 화석처럼 박제하듯 꼼꼼하게 새겼다. 그래, 그의 그림은 (무모한) “새김”에 가깝다. 회화의 평면에 자리잡은 (사라져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물의 모양이 비로소 제 윤곽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선을 도려내 다시 현실의 공간 속에 떨어뜨려 놓고 스스로 제 변환의 자리를 탐색하는 수행의 과정을 감행한다. 

   <폐곡선>에서는, 일련의 변환을 기꺼이 감수해온 형태의 윤곽선들이 단단한 벽을 끈질기게 기울였다 일으켰다를 반복하며 회화적 공간을 구축/구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낱장의 종이 위에 정교하게 그린 사물 모양의 드로잉을 가위로 오려서 삼차원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는 평평한 벽을 지지체 삼아 제 윤곽을 온전히 드러냈던 기존 작업 방식에서, 윤곽선을 따라 오려낸 드로잉 자체에 나무 지지체를 결합한 작업이 “나무조각 드로잉”이다. 종이에 그린 사물의 형태를 오리는 과정에서 그가 느꼈던 평면에서 입체로의 미세한 변환의 감각을, 그는 나무 판재 두께만큼의 양감과 무게와 부피를 동원시켜 현실에서 회화적 공간을 탐구하는 맹목적인 시간을 보내오면서, 다시 입체에서 평면으로 고정되는 회화의 자리로 되돌린다. 

   나란히 놓인 한 쌍의 <Untitled>(2022)는 세로의 길이가 2미터에 가까운 큰 그림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거대한 사물의 풍경을 포착한 것처럼 화면 바깥의 영역으로 연장되는 형태의 윤곽들은 매우 정교하고 긴밀하게 엮여 수직적인 힘을 드러낸다. 이 수직의 힘은,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물의 모양을 폐곡선의 윤곽으로 포착한 각각의 형상들이 텅 빈 허공에서 제 자리를 살펴온 지난한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부유하는 것과 하강하는 것 사이의 순간적인 긴장이 만들어내는 잠재적인 사물의 풍경이다. <폭발>(2023) 또한 정지된 장면 안에 응축되어 있는 물리적인 힘을 가시화 하는데, 허공으로 흩어지는 폭발의 잔해물이 중력으로 모아지려는 충동과 엮여 지극히 추상적인 회화의 평면을 구축해 놓는다. 

   양소정은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형상에 맹목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변환을 자처하는 형상에게 꿈틀거리는 윤곽선을 고정시켜 놓고 그것을 잠시 정지시켜 놓을 유예의 자리로서 허공/진공과도 같은 회화의 평면을 지지체로 삼는다. 그리하여, (불완전한) 우리의 두 눈이 어떤 원형에 대해 기억해낼 수 있는 “보기”를 지속할 수 있도록 형태의 윤곽을 매만진다. <깨진 물>처럼 그 가시성이 존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듯이, 양소정의 회화에서는 무생물의 사물이 예외적인 죽음의 표상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유령의 형상에 대한 (한시적인) 응시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그는 사물의 모양을 꼼꼼하게 살피며 그 형태에 충실한 그림을 그려왔는데, 유독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흡수하면서 반사하는 사물”로서 “진주”에 관한 짧은 노트를 써놓은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사물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다. [*작가노트 “진주”, 2021.4.14.]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형상이란, 그것의 죽음, 그러니까 그것과 닮은 임의의 흔적들을 현실에 남겨놓고 추상적인 물질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흡수하면서 반사하는 진주의 폐곡선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