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규화, 월동 준비, 2022, Oil on linen, 169X146cm

 

문규화, , 2022, Oil on linen, 149X143.5cm

 

문규화, 단합, 2020, Acrylic on linen, 193.9X112.1cm

 

문규화, 해를 보려는 움직임, 2020, Acrylic on linen, 72.7X72.5cm

 

문규화, 빛 먹은 나무, 2020, Oil on wood, 42X29.3cm 

나무에 머무르는 것들: 시선, 형태, 삶


콘노 유키 비평가

저기 보이는 나무, 그의 삶은 우리보다 덜 유동적인 상태로, 서 있는 곳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변화를 지켜봐 왔을 것이다. 한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본 저 나무. 설령 이파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나무는 자신의 삶을 간직한다. 사실 ‘활동’과 ‘삶’은 비슷하지만 다른 말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가시적인 움직임 즉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아닌, 차분하거나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고 계속되는 것이다. 나무에게  꽃이 피거나 푸른 새잎이 나는 것이 활동이라면, 한겨울에도 나무는 삶을 살아간다. 나무껍질이 벗기고 잎사귀가 떨어져도, 나무는 거기에 있다=존재한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문규화가 나무를 그린 이유는 나무가 거기에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나무는 제자리를 떠나 움직일 일은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물과 달리, 작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무의 존재를 향한다. 드로잉룸에서 열리는 문규화의 개인전 《월동 준비》에서 소개되는 작품이 나무 본체에 주목한 점 또한, 그것이 가만히 있기=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잎사귀가 떨어지고 가지가 부러진다고 해도, 나무의 본체는 거기에 있다.

 

어쩌면 절단되고 나서도 존재감을 보이는 것이 나무 본체가 아닐까. 바로 그것-그곳이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보고 화면에 표현할 때, 문규화가 보내는 시선은 죽거나 무기질적인 것을 보는 것과 다르다. 마치 토르소에 생기를 들여다보듯, 거기에 있는=존재하는 나무가 간직하는 삶을 향하게 된다. 곡선과 직선, 둥글게 돌아가고 가로로 뻗어나가는 힘이 화면에서 교차한다. 《월동 준비》에서 문규화가 그린 나무에 절단면이 드러나는 형태가 많은 이유는, 조형적인 탐구에 관한 작가의 관심에서 왔다고 이해할 수 있다[1]. 작품을 보면, 동그라미와 소용돌이 모양이 사각형 작품 속에 흐름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 절단면을 가진 나무 본체에 보낸 작가의 시선은 인간과 자연의 만남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사람이 가지치기하거나 나무 한 그루를 절단하면, 그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거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자르고 나서 동그라미 형태나 타원형, 눈 모양의 윤곽이 나타날 때, 사람은 나무의 내적 형태를 장악하게 된다. 위로 곧게 혹은 구부러져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과 달리, 절단면의 모양(윤곽)은 자연에서 보는 일이 잘 없다. 톱질의 흔적과 나이테는 절단면에 함께 만난다. 다소 거칠고 투박하게 나온 나뭇결이 그간의 삶을 몸소 기록해 온 나무에 머무른다. 말하자면 나무의 절단면은 무언가가 결여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접촉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접촉면은 작가가 나무에게 보낸 시선이 천이나 종이에 나무를 그리는 시선을 만나는 곳으로 작품에 머무른다.

 

나무가 간직하는 생기와 그것이 살아온 삶은 작가의 시선을 통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이 통과하면서 회화로 표현된다. 《축축한 초록》(프로젝트 경성방직, 2018)과 《바람이 더 불었으면 좋겠다》(갤러리 가비, 2019)에서 표피와도 같은 산의 겉모습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내부에 관심을 보낸 시선으로 그려졌다. 멀리서 보던 산에서, 숲을 지나고, 한 나무 앞에서, 절단된 나무가 담는 윤곽선, 윤곽선 안에 새겨진 나이테, 이 나이테가 간직하는 삶의 시간으로, 시선은 안쪽으로 더 깊숙이 향한다. 그런데 어쩌면 작가는 초기부터 자연과 사람, 즉 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 시기에 산을 그린 작품을 보면 일부분이 밝게 칠해지고 그중 하나는 <산을 자른 단면>(2018)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단면적으로 자른 산’이 아니라 ‘(어떤) 단면이 산을 자른’ 모습이 여기에는 그려져 있다. 여기서 ‘단면’은 바로 인간의 시선이다. 그것은 대상을 자연의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자연과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선이다. 인간의 시선, 바꿔 말해 보는 사람의 시선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에 생기를 들여다보는 접촉면을 만든다.

개인전 《월동 준비》가 열릴 때쯤, 밖은 더 쌀쌀해질 것이다. 월동 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준비를 하면서 가만히 있는, 기다림의 때다. 나무를 향한 시선은 거슬러 올라가, 나무를 보던 작가라는 사람으로 되돌아온다. 비록 작가의 그간 관심사가 자연에 더 많다고 하더라도, 그의 시선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담고 또 자기 자신을 본다. 약 3년 동안 전시를 하지 않던 시절에 주로 그려진 나무에는 안으로 향하는 시선이 담긴다. 이 시선은 문규화가 붓을 드는 작업실에서, 그리고 전시를 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지내던 삶을 향해 스스로 시선을 보낸다. 전시장에 걸려 있는 어떤 나무는 절단면이 이파리만큼 푸르다. 잘려 사라진 곳은 더는 무엇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가 아니라 자라나는 가능성을 공백에 남겨 둔다.



[1] 작가 또한 나무작업에 대해 특정 주제보다 조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많이 시도할 수 있었던 작업이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