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람
PARAM
이상현
2022.10.25(화) - 11.19(토)
파람
김진주
하늘과 산과 흙. 셋으로 분할된 공간을 걷는다. 수십 년 전 시작된 간척 사업으로 이미 흙이 바다를 메우고 우연히 산을 만들어 어설프게 하늘과 경계를 지어버린 곳이다. 공원도 공터도 아닌 이곳을 걸어본다. 걷다 보면 되직한 흙이 발에 밟히고 성그런 풀이 눈에 밟힌다. 작고 거친 돌을 차보거나 큰 산이 된 돌을 멀리서 바라도 본다. 그런 시간들 사이에 바람이 관통한다. 나의 몸과 이곳의 자연물들을 스치며. 어쩌다 이곳을 걷게 되었을까.
22.08.31-10.01., acrylic on canvas, 162.2 x 560.5cm, 2022
《파람》을 위해 이상현은 여섯 개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스물일곱 점의 그림을 건다. 2022년 5월 2일 부터 10월 19일 까지 그린 그림들은 사생(寫生)의 방법론을 따른다. 여기서 사생은 사실주의(realism)의 의미에서 눈앞에 놓인 현실의 단면을 비판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경치를 옮겨 그리기 위한 것이다. 현실의 단면을 그리는 역사보다 먼저 시작된 눈에 보인 것을 모방하는 역사는 이미 닳고 닳아 고리타분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사이 남몰래 성장하고 자리를 옮겨간 자연물들은 선험적 지식과 경험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감흥의 발현을 띄워 올린다. ‘단면’을 그리고자 할 때는 찰나의 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찰나에 찰나가 더해진 다섯 달은 복합적인 시간의 산물을 동반한다. 느리고 뭉근하게, 입장의 표명보다 감흥의 표현으로서 그림을 자연히 솟아나게 만든다.
22.08.25., acrylic on canvas, 27.3x 45.5cm, 2022
* 22.08.25-08.29. 의 일부
이상현이 보내온 다섯 달의 시간 중 가장 작은 단위는 하루다. 하루 사이 어떤 일을 겪을까. 어느 날은 하늘 아래 놓인 돌산을 본다. 또는 돌을 주워 탑을 쌓거나 흙을 파서 구멍도 만들어 본다. 물감을 짜고 붓과 나이프에 묻혀 빠르게, 던져버리듯이 캔버스 위에 얹는다. 캔버스의 크기에 따라 길게는 이틀 이상, 짧게는 몇 시간, 더 짧게는 몇십분이 걸려 그림 하나를 완성한다. 그다음, 혹은 그다음 날, 다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 적게는 네 점을, 많게는 아홉 점을, 때로는 여러 폭에 반복하여, 때로는 여러 폭에 나누어 완성한다. 그렇게 빠른 속도와 연속된 나날 속에서 닮은 듯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모양새의 공간을 그려내고 하나로 엮어 연결한다.
22.05.02.-05.13., acrylic on canvas, 136.5 x 136.5cm. 2022
진정한 사생은 이상적 세계에 가깝다. 인간의 눈이 만물의 실제 색을 보지 못한다는 인지과학적 증명과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도 풍경의 형태가 시시각각 변한다는 객관적 사실은 완전한 사생의 일부만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 이상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흐릿한 눈으로 색감을 입력하고, 직선과 곡선을 오가는 커다란 굴곡의 차이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거시적인 공정에 집중할수록 어느 순간에서는 ‘화가’의 머릿속에 담긴 선대 화가들의 기술을 모방한다. 흐린 눈과 모방한 기술. 하루 안에 그린 한 폭의 그림, 여러 날에 걸쳐 연결한 연작에 두 요소가 섞여 묘하게 부자연스러운 화면들이 만들어진다.
22.05.13., acrylic on canvas, 45.5 x 45.5cm, 2022
* 22.05.02.-05.13. 의 일부
우리에게 풍경화는 무엇이었고, 이상현에게 풍경화는 무엇일까? 하나의 그림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역사에서 탈출해 행위의 장으로서 풍경화의 역할이 변화된 지도 이미 수십 년. 감흥의 발현에서 출발한 이상현의 그림들은 점점 건조해진 화가의 눈을 증명하는 일로 뻗어간다. 발치에 놓인 돌에 하늘과 풀로 이루어진 ‘풍경’을 물감으로 칠하고 돌을 다시 흙 위에 놓은 뒤 그 모습을 그린 ⟨motion capture (22.06.11.-06.14)⟩은, 풍경의 모션(motion)을 포착한(capture) 것이다. 대상(하늘과 풀)의 위치와 움직임을 계산해 아바타(돌)에 덧댄 이 그림처럼 작은 하루가 쌓여 만들어진 긴 다섯 달 속에서, 이상현의 풍경화가 풍경화로서 갖는 의미는 구태의연해진 동시에 외딴곳으로 점차 멀어진다.
22.06.18.-06.27., acrylic on canvas, 181.8 x 121.2cm, 2022
‘파람’은 ‘휘파람’의 접미사다. 휘파람을 불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몸만으로 운용할 수 있다. 음의 진행이 연속적인 만큼 입 모양을 조금만 달리해도 즉, 주관적 움직임에 따라 음정의 변화도 자유롭다. 그런 의미에서 ‘파람’은 휘파람이라는 단어에 소리가 타고 흐르는 바람의 형태가 존재함을 지시한다. 접두사 ‘휘’를 떼어낸 파람에는 소리의 자리가 없고, 행동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연속되는 동시에 작은 행동의 변화에 민감히 감응하는 상태. 자연을 보는 이상현의 감각과 이를 그림으로 옮기는 손짓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풍경화들이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작은 변화들. 아마 파람을 닮았는지도.
22.06.27., acrylic on canvas, 60.6 x 60.6cm, 2022
* 22.06.18.-06.27. 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