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네모들 Textured Blocks
Jo Sang-eun
2021.12.08(수) - 2022.01.08(토)
‘공간’인 척하는 ‘평면’ 혹은 ‘평면’을 구성하는 ‘공간’에서
콘노 유키 (미술비평)
기묘한 이야기다. 미술가는 분명 캔버스라는 바탕에 무언가—물감, 붓 자국, 재현 대상—를 추가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화를 추가된 결과가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간주한다. 캔버스라는 지지체는 추가된 것들의 뭉치나 모음 대신 회화로 여겨지는데, 마치 운명이라도 하듯이 (재료나 행위를, 그리고 배후에 감춰져 있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겪는 매체이다. 다른 방법도 있다. 캔버스를 거의 그대로, 바탕 자체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때 회화는 환영의 공간이 더는 아니다. 그렇지만 마치 사물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즉 받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미니멀리즘과 포스트-미니멀리즘 회화에서 사물과 같은 캔버스는 회화의 추가적 성격을 바탕의 노출을 통해서 부각하는데, 결과적으로 캔버스라 더는 불리기 어려운, ‘확고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두 방법은 결과적으로 같은 운명을 향하게 된다. 감춰져 있건 확고하건, 회화의 추가적 성격은 망각된다.
최근 빈번히 보는 회화에서 추가적 성격이 부각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인쇄와 에어브러쉬를 비롯한 기술과 짜내기,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놓고 칠하고 떼기와 같은 제작 방법을 아우른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작품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은 캔버스에 대한 관심보다 모니터에 대한 관심처럼 와닿는다. 붓질로 힘이 전달된 경우와 다르게 이러한 결과물에서 작가의 손의 흔적을 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도 손에 붓을 들고 작업을 할 수 있지만, 이 새로운 기술에서 그리기, 붙이기, 그리고 출력 형식까지 아울러 재현에 관해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캔버스는 모니터의 표상 방식을 닮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조정/조종 가능한 감각은 여러 가지 기술과 제작 방식이 통합될 바탕인 뿐만 아니라 소재/재료로서 다뤄질, 그러니까 다시 캔버스와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여러 개의, 여러 가지 대상을 소재로 삼을 수 있으며, 그것 또한 소재가 되어 캔버스나 벽면, 오브제와 같은 지지체를 만날 수 있다. 추가의 성격은 모니터를 닮은 회화에서 그 성격 때문에 오히려 납작해진다.
무제(두께가 있는 표면) Untitled(Surface with Thickness)
2020, Acrylic on canvas, 53×53×4cm
여기서 레이어와 스킨 또는 막이라는 말로 묘사되듯이 모든 것을 추가할 수 있거나 덧씌워 가장할 수 있게 된 일은 지난 세기 회화가 받아들여온 방식의 반복처럼 보인다. 레이어의 중첩은 결국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표면을 앞세웠고, 스킨이나 막은 지지체에 (거의 일체화하듯) 기입되어 그림을 장식처럼 또는 아예 물건처럼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회화를 인식하는 방식과 회화의 조건을 탐구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적어도 애초의 문제 제기가 ‘시대적’이라는 수식어로 빠져들기 전에 가능하다면 말이다. 조상은의 개인전 《두툼한 네모들-Textured Blocks》에서 선보이는 일련의 작업은 언뜻 보기에 레이어의 중첩이나 스킨(또는 막)처럼 이미지로 씌워지고 가장하기 같은 말로 요약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은 그런 시대적 방법론에 종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화를 보는 사람이 인식할 때 회화임을 구성하는 조건에 대해서 탐구한다고 생각한다.
4 곱하기 4 혹은 그 이상 Four Times Four or More
2021
Acrylic texure medium on wood panel
in two parts, each: 15.8×15.8×4cm
4 곱하기 4 혹은 그 이상 Four Times Four or More
2021
Acrylic texure medium on wood panel
in two parts, each: 15.8×15.8×4cm
조상은의 작품은 언뜻 보면 오브제처럼 보인다. 타일처럼 무게가 있어 보이는 작업들은 사실 캔버스에 그려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이미지로 가장해서 플랫해 ‘보이거나’ 무게가 없다고만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작가가 물감을 몇 겹이나 올려 실제로 무게가 캔버스 표면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스킨처럼 얇고, 바탕에 장식처럼 기입된 작업이었다면 먼저 꺼낸 설명만으로 충분하다. 아예 오브제나 사물로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조상은의 작업의 경우, 두께가 쌓인 물감이 지층처럼 기록된 캔버스로 나타난다. 앞서 본 회화의 추가적 성격은 그의 작품에서 물감의 지층이 더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드는 주변에 물감의 층이 추가되고 쌓여서 하얀 모서리로 남게 된 결과이다.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격자는 언뜻 모니터 상에 펼쳐지는 모티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네모 안에 나타난 추가적 성격은 오늘날 모니터를 닮은 회화를 향해, 또는 그렇게 보는 사람들에게 의견 제시를 하고 있는 것처럼 와닿는다—네모 안의 이미지, 즉 모니터, 모니터를 닮은 작품, 그리고 무엇보다 회화는 사실 이미지나 물감 자체가 더해지고 쌓인 결과에 지지된다고 말해주듯이.
10개의 조각 10 pieces (part image) , 2021, Acrylic on wood panel, in ten parts, each: 25.8×14×4cm
조상은의 작품은 ‘공간’인 척하는 ‘평면’, 바꿔 말해 ‘평면’을 구성하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회화는 사실상 무언가가 추가된 ‘공간’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품이나 사물/오브제/대상, 심지어 (모니터까지 아울러 부를 수 있는) 화면이나 이미지라는 말을 앞세우게 되면서 ‘추가’라는 속성을 종종 망각한다. 조상은의 작품에서 우리는 지층처럼 추가되고 기록된 회화의 속성을 보게 된다. 대상의 묘사가 사실적인 환영에서, 확고한 오브제로 나온 미니멀리즘 작업에서, 심지어 최근 ‘내보내기’ 형태로 모니터를 닮은 작품에서 우리는 회화의 추가적 성격을 못 본 척하고 왔다. 재현되어 그려지거나 바탕에 색‘면’을 씌우거나 가능한 한 얼마든지 이뤄지는 ‘붙여넣기’는 무언가를 붙인, 즉 더하고 추가한 결과이다. 작품으로 뭉뚱그려 말하거나 사물 자체로 보는, 그리고 동시대적 특성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대신 조상은의 작품은 회화가 어떻게 인식되고 내부적으로 조건을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무제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53×53×4cm
무언가가 그려진 바탕, 무언가가 기입되고 추가되고 올려진 바탕인데도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보는 시선 대신 무언가가 쌓인 것으로, 두께를 부여받은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조각 작업의 덩어리나 더하기에 더하기를 반복한 설치 작업이 아닌 회화 작업이다. 실제(장면이나 대상)와 같은 회화, 물건 같은 회화, 모니터 같은 회화가 무의식적으로 구성하는 지층을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물감의 겹들과 네모난 구조, 심지어 조각낸 것 같은 조합으로 부각한다. 두께의 지층을 간직한다는 점에서 조상은의 작품은 회화의 추가적 속성을, 더 정확히 말하면 명확하지만 가려져 있는 추가적 속성을 포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