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도 주름이 있다면
누군가의 주름진 얼굴을, 혹은 손등을 쓰다듬어본 적 있을까. 그때 손끝에 느껴진 살아있음의 온기와 미세한 굴곡을 기억하는가. 힘과 마찰에 의해 융기하고 침식한 지표면처럼, 피부라는 표면 위에도 시간이 만드는 모양이 드러나 있다. 솟아오르고 내려앉은 주름 사이로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이 접혀 있다. 미끄러지듯 빠르게 훑고 지나가면 알 수 없는 것들, 천천히 애정을 들여 여러 번 쓰다듬어야 느껴지는 미세한 감각이다.
강유정의 회화 앞에 서면, 이렇게 천천히 쓰다듬는 감각이 느껴진다. 다른 점이라면 손이 아니라 눈으로 쓰다듬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조개와 돌, 껍질과 씨앗, 천의 주름, 산과 바다의 표면 등을 바라보며, 그 위에 남은 힘의 방향을 따라간다. 그의 그림은 대상의 외형을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화면 안에 세계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물질들이 각자의 무게와 밀도에 따라 시간과 마찰하며 만들어낸 흔적, 즉 세계의 표면에 남은 주름과 결을 더듬는다. 언뜻 보면 고요하게 정지된 흑백 사진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붓질을 따라 눈으로 화면을 쓰다듬다 보면 화면의 앞뒤로 길게 이어지는 물질의 운동이 드러난다.
검은 풍경의 결
강유정은 일관되게 풍경을 다루어왔으나, 이를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장소를 직접 밟으며 풍경을 마주하고, 그곳에 스며든 시간과 기억의 층위를 확인하며, 그것이 풍경의 표면에 남기는 흔적에 주목해왔다. 초기 작업에서 다루었던 말해지지 않은 역사와 기억이 남은 장소는 그 출발점이었다.
다만 그는 풍경에 남은 시간과 기억을 직접 재현하거나 하나의 서사로 수렴시키는 대신, 이를 더 긴 시간의 질서 속에서 확장하여 바라보았다. 인간의 사건은 장소에 새겨지고, 장소는 비와 바람, 퇴적과 침식, 반복과 순환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다른 표면을 얻는다. 이는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역사적 흔적이지만, 물질의 시간으로 본다면 세계가 계속해서 움직이며 표면에 남긴 운동의 자국이 된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작가가 “검은 풍경”이라고 부르는 회화적 세계가 있다. 강유정은 “검은색은 풍경의 색이자, 스며든 시간의 색이며, 동시에 회화를 위한 색”이라고 말한다. 그의 검은색은 단일한 검정이 아니라, 엷은 회색부터 짙은 먹색까지 이어지는 무채색의 스펙트럼이다. 색채가 줄어든 자리에는 명암과 윤곽, 그림자와 질감, 붓질의 방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강유정의 회화에서 검은색은 시야를 어둡게 덮는 그늘이 아니라, 세계의 운동을 느리게 관찰하며 고유한 구조와 질감을 목격하게 만드는 회화적 조건으로 작동한다.
오름과 바다, 들판과 파도는 서로 다른 자연 현상으로 만들어진 풍경이지만, 색을 줄이고 시선을 표면 가까이 붙이면, 구체적 정보들이 사라지고 각각의 풍경이 지닌 조형적 구조가 눈에 띈다. 작가는 여기서 서로 다른 풍경 사이의 닮은 ‘결’을 발견한다. 여기서 닮음은 외형의 유사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각자의 시간을 지나온 힘의 방향이 잠시 겹쳐 보이는 순간을 말한다. 강유정은 이러한 운동을 서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운동이 물질의 표면에 남긴 결을 발견하며, 시선과 붓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 결에 자신의 감각을 잠시 조율하며 겹쳐보는 사람이 되길 택한다.
운동하는 세계
이번 개인전 《Shells and Stones》에서 강유정은 이러한 흐름을 대상의 표면 가까이로 더 밀어 본다. 주로 풍경을 다루던 전작들에서 개별 사물로 옮겨온 화면은, 크기가 축소된 것이라기보다 표면에 더욱 밀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개와 돌, 열매와 부조, 산과 바다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크기와 기원을 갖지만, 모두 그 표면에 시간과 힘의 작용을 품고 있다. 강유정은 이들을 특정 자연물의 표본이나 구체적 기능을 가지는 사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각각의 물질이 외부의 힘, 내부의 성장, 반복되는 시간에 어떻게 반응해왔는지를 발견한다.
전시의 주요한 두 축인 Shell과 Stone은 서로 다른 시간의 방식을 가진다. 조개(Shell)는 바깥으로 층을 확장하며 껍질 위에 생장의 시간을 새긴다. 그 표면에는 보호와 성장, 반복과 확장의 흔적이 미세한 선과 층으로 남는다. 이는 바다의 수면이 바람에 의해 밀고 당겨지며 일어나는 파도의 모양과 닮았다. 반면, 돌(Stone)은 내부로 응축하는 힘을 가진다. 오랜 압력과 외부의 힘에 의한 침식과 균열, 마모를 거치며 서서히 다른 표면을 가진다. 그리고 이는 내부의 커다란 힘을 지닌 산과 암벽의 구조와 닮았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했으나, 양쪽 모두 힘의 운동이 물질을 지나가며 남긴 결을 가진다.
한편, 붉은색 깃발과 벨벳 천을 그린 작품 <깃발(Flag)>과 <벨벳(Velvet)>은 이러한 논점을 자연물 너머로 확장한다. 검은색으로 그린 천의 주름은 마치 거대한 산맥이나 행성의 지표면처럼 보인다. 사실 천은 조개나 돌, 산이나 지층처럼 자연이 긴 시간에 걸쳐 만든 물질이 아니다. 또한, 산맥의 주름이 오랫동안 축적된 지각운동의 결과라면, 천의 주름은 한 번의 손길과 순간의 중력이 남긴 짧고 약한 운동의 결과이다.
강유정은 이 서로 다른 물질들이 각자의 속도로 힘에 반응하며 만들어낸 반응의 유사성을 목격한다. 다른 존재로 명명된 것들이 그의 화면 위에서 닮은 구조로 수렴되며 더 큰 질서를 드러낸다. 검은 풍경을 눈으로 좇다 보면, 우리가 모르는 더 거대한 에너지, 더 긴 시간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탁본의 감각
이번 전시에서 강유정은 물질의 표면에 남은 힘의 방향과 시간의 축적을 관찰하고 서로 닮은 구조를 발견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표면을 회화라는 또 다른 표면으로 옮기는 방식이다. 작가가 사물의 표면에서 발견한 결은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과 행위, 유채의 물성을 통과하며 다시 새로운 회화적 결을 형성한다.
그는 검은 유채를 연필로 하는 소묘와 유사한 방식으로 쌓아 농담을 만든다.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다음 층을 올리며 위아래가 자연스레 섞이도록 그리기 때문에, 화면에는 두터운 마티에르 대신 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막이 형성된다. 작가는 대상을 관찰하는 일을 “눈으로 만지는 것처럼 본다”고 했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붓으로 한 번 더 보는”일과 같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붓질은 사물의 표면을 천천히 만지듯 엷고 가볍게, 그러나 무수히 반복되며 화면 위에 퇴적된다.
이렇게 반복된 붓질은 마치 대상의 표면을 여러 번 두드리고 문질러 떠낸 탁본을 연상케 한다. 물론 그의 회화는 실제 탁본도 아니고 기법도 다르다. 서로 다른 행위지만, 탁본의 두드림과 강유정의 붓질은 모두 표면을 반복적으로 더듬어 그 위로 결을 불러내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조개와 파도, 천과 산맥이 서로 다른 물질과 시간 속에서 닮은 방향을 남기듯이.
강유정은 이렇게 세계를 한눈에 빠르게 파악하기보다, 수없이 얇게 쌓인 층위와 미세한 결을 따라 시간이 지나간 방향을 더듬어 찾는다. 고고학자나 지질학자가 기나긴 시간의 조각을 발굴하듯, 표면을 더듬으며 풍경과 사물의 표면에서 오래된 시간을 감지한다. 작가의 눈이 사물을 천천히 어루만지듯 작가의 손과 붓이 화면을 수없이 쓰다듬으면, 우리가 이름 붙인 것들의 경계가 사라진다. 마침내 퇴적한 시간이 회화의 얇은 막 위로 떠오른다.
회화의 운동
세상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질서 아래 끊임없이 운동한다. 눈앞의 작은 존재조차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표면을 만져본다 하더라도 그것이 견딘 시간을 겨우 가늠할 수 있을 뿐, 주름 사이에 접힌 시간 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겹쳐보고, 그 방향을 따라가 보려 한다. 긍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미끄러지듯 빠르게 훑고 지나가면 어떠한 여지도 남지 않는다.
강유정의 회화는 바로 그 여지 앞에 멈추어 선다. 그의 그리기는 세계를 멈추어 이미지 안에 가두거나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운동하는 세계가 표면에 남긴 흔적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잠시 늦추는 일이다. 눈으로, 붓으로 쓰다듬으며 잠시 곁에 머무는 일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같은 방향으로 나의 궤도를 맞추어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시장을 채운 Shell과 Stone의 이미지 사이에 놓인 복숭아 씨앗 그림 한 점은, 다음을 향해 열린 작은 단서처럼 남는다. 조개와 돌에서 지나온 시간이 표면에 남긴 결을 읽는다면, 씨앗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안쪽에 접힌 모양을 어렴풋이 읽어볼 수 있다. 시간의 방향은 서로 다를지라도, 어떤 존재가 시간을 통과하며 운동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강유정은 그 서로 다른 시간의 방향을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과 붓질을 그 결에 잠시 맞추어본다. 이렇게 형성되는 회화라는 얇은 막은, 세계를 대하는 작가의 몸과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일종의 탁본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속도는 여전히 빠르다.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은 잊히며, 있었던 일은 말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의 구체성을 영원히 알 수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시간의 결에 함께해보겠다는 것, 같은 결의 방향으로 몸을 기울여보는 일이야말로 보다 적극적인 이해의 태도가 아닐까. 그러니 결을 함께 한다는 것은 시간을 같이 견딘다는 뜻이다.
오늘날 시간과 노동이 소요되는 회화가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 작업 하나로 완벽하게 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방향은 여기에 있다. 관객의 시선이 화면의 결을 따르며 잠시 머무를 때, 표면 위에는 또 다른 공명의 힘이 생성된다. 그 힘은 화면 밖으로, 또 전시장 밖으로 이어지는 회화의 운동이 된다.
글 김지연 (미술비평가)
강유정(Kang Youjeong, b.1992)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와 미술사학을 공부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에스키스 심포니 (상업화랑, 2022)’, ‘불꽃과 파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발현 發玄 (성남큐브미술관, 2019)’ 등 개인전을 열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의 ONSO ARTIST (2022)에 선정되었으며, 서울문화재단 (2026), 성남문화재단 (202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3)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4기 입주작가 (2020)로 활동한 바 있다. 이 밖에도 작품론을 다룬 석사와 박사 학위 논문으로 두 차례 우수학위논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