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현, 물 위에 선 남자, 2024, Oil on canvas, 45.5×53cm 


이희현, 커플, 2009, Oil on canvas, 60.6×90.8cm 


물 위에 선 남자


송연승 미술비평

별다를 것도 없는 순간인데 묻혔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수년간 한 번도 되새긴 적 없던 기억들이, 양쪽에서 파 들어간 두꺼비집 모래 터널이 뻥 뚫리듯 갑자기 머릿속이 열리며 줄지어 이어진다. 그날의 온도, 냄새, 소음, 어쩌면 날벌레 한 마리가 트리거로 작동했을 것이다. 잠겨 있다 불시에 불려온 기억은 현실과 조우하며 세미하게 달라지고, 다시금 내 안 어딘가 자리 잡는다.

이희현은 이런 반짝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현실의 어떤 실마리가 동기가 되어 그의 의식과 무의식에 내재된 기억들, 체화된 경험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현재의 상황을 만나면서 충돌하고 어긋나며 균열을 일으키지만 그 틈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유와 감각이 한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발견된 흥미로운 현실은 잠자던 기억을 신선하게 바꾸어놓기도 하고 권태롭고 지루하던 일상에 예기치 못한 색을 입히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는 출발점이자 동기인 현실세계에서 발을 떼지 않으면서 동시에 새롭게 마주한 그것을 이해하기 쉬운 모양으로 재현하길 꺼린다. 자칫 초현실 혹은 비현실의 경계를 훌쩍 넘어버리는 일이 없게 단속하는 한편, 대상도 주변도 상황도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도록 밀고 당기는 것이다. 읽을 수는 있지만 해독되지 않는 글처럼, 경계 언저리에서 생성되는 이희현의 그림은 모호하고 꺼림칙하지만 궁금하고 유혹적이다. 일상(日常)과 이상(理想), 현실과 탈현실의 경계에 서기 위해 그는 감독이 된 듯 인물과 물체에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고, 밝음을 도구로 무게와 부피, 음영과 원근을 덜어내기도 한다.

그에게 밝음은 사물과 공간의 형, 색, 질감이 분명해지는 적절한 광도를 벗어난, 그래서 때로 디테일이 무너지고 시야가 하얗게 차단되기에 이르는 무엇이다. 그림자처럼 내내 그를 따라붙는 유년 기억들이 있다. 눈부시게 환한 방 안 무명천에 누인 동생의 투명한 살결, 유난히 눈이 많던 동네에서 사정없이 되비치던 백색광, 툇마루에 누워 바라보던 가없는 하늘 빛깔 같은 것들. 밝음에 붙들렸던 기억의 단편들은 끊임없이 재소환되면서 아득히 멀고 눈부시게 청결하며 부유하듯 가벼운 아름다움을 향한 영감의 원천으로서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발리 여행의 기억에서 비롯된 그림들(〈풍경〉〈물 위에 선 남자〉)에서 작가는 밀도와 안정감을 위한 비율과 음영을 거두고 빛 안에, 그 빛을 담은 공기 안에 열대의 폭양(曝陽)에 젖었던 감흥을 담았다. 눅진한 대기의 층, 현란한 바다의 층, 달아오른 모래의 층 위로 떠도는 환한 빛은 섬세하고 찬찬하게, 불분명하고 야릇하게 색조의 변화를 일으키며 사물과 공간의 형태와 경계를 넘나들고, 밝음 아래에서 인물과 자연은 혼입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의상을 미처 벗지 못한 배우들이 너저분한 무대 뒷방에 모여 앉았나 싶기도 하고 그 자체가 연극의 한 장면 같기도 한 〈소나무 언덕이 보이는 방에서 인물들은 탁자에 놓인 상자 속 물건들로 다소 난감한 상황에 처한 듯 보이지만 실은 옆에서 누가 나자빠지든 옷을 벗고 활보하든 서로 무심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상자 따위 아무도 관심 없을지 모른다. 그저 시선이 닿았을 뿐 각자의 생각은 알 길 없으니 말이다. 이희현은 이들이 자기 작업실에 놓인 그림들 같다 말한다. 멋대로 눕고 선 그림들은 어쩌다 그렇게 모인 채 저마다의 표정으로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에서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작가는 연출자가 되어 장면을 기획한다. 다양한 맥락에서 상황과 인물을 취해 배치하고, 시든 이파리의 잎맥이나 손등의 핏줄처럼 놓치기 쉬운 요소들에 느닷없이 중요한 역할을 부과해 전면에 내세우기도 한다. 미장센이 결정된 다음 벌어지는 모든 일은 보는 이의 몫이다. 관람자 각자의 기억과 경험과 상상력과 해석의 범주 안에서, 그림 속 사물과 인물은 자체적으로 의미를 획득하고 자발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희극이든 비극이든 이야기를 빚어간다. 〈알코올〉에서는 편안하게 자리를 즐기는 이들과 달리 유독 한 사람이 피곤에 지쳐 보인다. 함께 앉았으나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외톨이 신세다. 공간을 지배하는 무자비한 조명은 그의 눈만이 아니라 상한 마음까지 가차없이 찌른다. 화사한 목련 앞에서 나란히 봄볕을 쬐는 〈봄〉은 보는 순간 실소가 터졌다. 아무리 후히 보아주려 해도 도무지 이 벤치 삼총사의 쥐구멍엔 볕 들 날이 없겠다 싶어서.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비루한 청춘을 나 또한 지내왔기 때문일 터이다.

그가 천착하는 주제의 하나인 남녀 그림은 헛짚이기 일쑤다. 부녀처럼 보이는 두 사람(〈커플〉)도, 천둥벌거숭이 동무처럼 보이는 두 사람(〈밝은 방〉)도, 성별이 아리송한 안드로진 같은 두 사람(〈애가〉)도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연인이기 때문이다. 불륜 아니면 로맨스로 싸잡히곤 하는 남녀의 사랑도 들여다보면 갖가지 감정이 개입되고 뒤섞이며 복잡한 의미를 띤다. 누군가는 당당하고 뿌듯하지만 누군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게 부끄럽고, 그늘 한 점 없는 밝은 방에서 벌거벗은 채 순수인지 욕망인지 모를 미묘한 설렘으로 일렁이기도 하며, 성정체성을 공유한 듯 서로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이해가 꽃처럼 피어나기도 한다. 가족과 부부 그리고 시인에게 인간으로서 숭고함을 느낀다는 작가는 시인의 초상을 그리는 마음으로 남녀를 그린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인들은 하루하루 정성스레 살아가고 베풀고 배려할 줄 알며 마침내 내적 존재가 연꽃처럼 열린, 평범하지만 비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누구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물 위에 선 이희현은 조금은 위태롭지만 수면에서 미끄러지듯 파도를 타며 현실과 다른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육중해지거나 멈춰버리면 가라앉고 말 것이므로, 그는 머물기보다 스쳐가듯, 선명하기보다 희미하게, 주장하기보다 흥얼거리며 새처럼 가뿐한 그림을 검질기게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