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형 Lee Jinhyung, Hang, 2024, Oil on canvas, 162.2 x 112.1 cm
© Courtesy of the artist
이진형 Lee Jinhyung, Paint, 2024, Oil on canvas, 162.2 x 112.1 cm
© Courtesy of the artist
이진형 Lee Jinhyung, 배경5 Background 5, 2024, Oil on canvas, 53 x 80.3 cm
© Courtesy of the artist
이진형 Lee Jinhyung, 배경6 Background 6, 2024, Oil on canvas, 53 x 80.3 cm
© Courtesy of the artist
이진형 Lee Jinhyung, 배경7 Background 7, 2024, Oil on canvas, 53 x 80.3 cm
© Courtesy of the artist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것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 것, 그러니까 이진형의 회화가 담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무엇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드러나지도, 완전히 숨지도 않습니다. 찬찬히 바라보면 뚜렷해지는 듯하다가도, 금세 희미해져 사라집니다.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하기 직전에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과도 닮아 있습니다. 아직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이미 공기 속에 감도는 형체처럼, 이진형의 작업은 그렇게 눈앞에 머뭅니다. 그것은 이야기라기보다는 뚜렷한 형태로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나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또렷한 목소리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질문 속에 머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의외로 익숙한 풍경처럼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그의 회화는 새벽 무렵의 하늘빛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며 변화하는 흐릿함 속에 존재합니다.
그의 작업은 이미지를 바라보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작가는 일상에서 목적 없이 이미지를 수집합니다. 마치 휴대폰 사진첩 속 스크린샷처럼,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담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미지를 반복해서 바라봅니다. 관련 없어 보이던 사건과 장면, 그리고 이미지 사이에 미묘한 정서적 연결이 생겨나고, 흩어진 조각은 마치 얼기설기 엉겨 붙인 점토처럼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합니다. 작업이 시작되면, 그의 시선은 캔버스에 머뭅니다. 그가 바라본 풍경과 느낀 감각은 고유한 방식으로 화면 위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선명하지 않습니다. 이진형의 회화는 형상을 덧씌우고, 지우고, 또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관람자로서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았고, 그것이 그의 내면을 어떻게 통과해 화면에 자리 잡았을지 떠올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짐작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해도, 서로에게 떠오르는 형상과 이야기는 아마도 전혀 다른 모습일 테니까요.
우리의 감상 역시 이미지를 바라보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이름 지워진’이라는 전시의 제목을 보고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기존과 달리 작품에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이름이 지워진다(erase)는 것은 그 이름이 한때 존재했음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이름이 지워진다(burden)는 것은 의미가 부여되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제목은 작품 감상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의미를 고정시키는 닻이 되기도 합니다. 사전 정보 없이 들어선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기도 전에 캡션을 읽고 누가 그린, 어떤 제목의 작품인지 확인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이번 전시에서 이진형의 회화는 제목을 통해 관람자에게 친절한 힌트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기대를 흐트러뜨립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제목 덕분에 "아, 이래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지만, 그 반응조차도 관람자마다 다를 것입니다. 이진형의 작업은 단일한 의미로 닫히기를 거부합니다. ‘이해한 것과 경험한 것은 다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업은 관람자와의 관계 속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형성합니다. 작품 앞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낄지는 결국 관람자의 몫입니다. 이 열린 상태야말로 그의 작업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진실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마주하는 작품과 지금처럼 전시장에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잡은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진형의 회화는 공간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그의 작업이 의미로 가득 채워지기보다는, 잠시 머물러 있는 상태에 가까워서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세쌍으로 묶인 연작의 화면을 겹쳐서 배치합니다. 뒤편의 작업이 반 이상 가려지는 설치 방식은 궁금증을 자아내면서도 묘하게 안정된 느낌을 줍니다. 작업이 서로를 가리면서도 드러내는 방식은 그의 작업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관람자는 단일한 시점에서 고정된 이미지를 보는 대신, 겹쳐진 화면이 만들어내는 흐름과 가려진 공백을 떠올리게 됩니다. 겹쳐진/가려진 화면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회화가 고정된 이미지로 머무르지 않고 공간 속에서 새로운 구조(덩어리)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실험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순간에 멈춰 서게 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이루다 어딘가 엇나가는 순간이라든가,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히 바라본 횡단보도에 남겨진 발자국 같은 것들을 마주할 때처럼 말입니다. 그것들은 잠시 우리를 붙잡아 두고, 익숙한 것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그런 순간들. 이진형 작가의 작업은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낸 화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작업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레이어 뒤에 감추어진 무언가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다가도,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단지 눈 앞에서 이를 발견하려는 우리의 시선과, 그의 작업이 만들어내는 작은 파동이 부딪히며 조용히 흔들릴 뿐입니다.
이번 전시는 당신에게 그렇게 다가올 것입니다. 작가가 화면 위에 담아낸 것들은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놓여집니다. 그러나 그가 본 것들이 온전히 전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회화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을까요. 서두르지 않고, 작품과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감상해 보세요. 당신의 감각이 둘 사이의 간극을 더듬어 채워가는 동안,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고,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보았다고,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끝내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이 또한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답이니까요.
이규식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학예연구사)
이진형(b.1982)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4painting》(Hall1, 서울, 2023), 《O》(더 소소, 서울, 2022), 《pinhole》(에이라운지, 서울, 2021), 《비원향》(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을 개최하였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이미지가 형태가 될 때》(스페이스 카다로그, 서울, 2024), 《그 "밖"의 것들》(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전시실 1,2, 서울, 2023),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아르코미술관, 서울, 2023), 《The SoSo special》(더 소소, 서울, 2022), 《시시각각》(드로잉룸, 서울, 2021)을 비롯한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23)와 인천아트플랫폼(2022), 창작공간 달(2021)의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 인천문화재단 미술은행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