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ential love

유기농 같은 사랑


오지은

2022.08.11(목) - 09.08(목)​

쏟아지는 사랑의 미래

김지연_미술비평

그날의 분위기를 알고 있다. 손과 손의 살갗이 부대끼는 감촉과 온도, 노을이 비쳐 붉게 빛나던 당신의 눈동자, 습도 높은 공기에 섞여든 짙은 초록의 냄새, 시끌거리다 이내 잦아든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구체적 형상이 없는 것들. 형체 없는 사랑의 기억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와인 얼룩이 남은 잔을 본다. 가득 차 있을 때는 기쁨이든 분노든 가득 찬 그것만 보였다. 한 잔 또 한 잔, 다시 한 잔, 마지막은 늘 그렇듯 원하지 않은 맛이었다. 그럼에도 남김없이 마셔야 해서 아팠다. 가득 차 있을 때는 색과 모양이 분명해 보였는데, 이제 얼룩 위에 얼룩이 겹쳐져 투명한 잔 위에 얇은 잔해만 남았다. 시간을 겪으며 감정을 부풀려왔지만 이제 납작해져 버린 우리의 모습 같다. 잔과 잔 사이를 흐르는 공기를 응시하며 빈 잔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깨닫는다. 이 공기에 사랑이 가득 스며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너밖에 없어’라는 말은 정말이지 얼마나 쓸모없는지. 주었던 마음을 거둬야 하는 일은 잔인하다. 사랑은 여러모로 지랄 맞다. 

슬픔에 대처하는 자세 Attitude coping with sadness,  Oil on canvas, 162.2 × 130.3cm, 2022

가슴으로부터

작가는 마음에 담은 감정의 모양을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할까. 오지은 작가의 전작은 대체로 기억을 정제한 뒤, 마치 지난 노래를 재생하듯 펼친 것들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특히 사랑은 오늘의 색이 가장 진하다. 그 짙은 색 위로 온몸을 던져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작가는 펄떡이는 오늘의 감정을 살려내기로 했다. 

감정을 표현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정리했다면 그것으로 작품의 역할은 다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시인 키츠(John Keats, b.1795)는 '밤새도록 격정을 불사르며 쓴 시를 새벽에 불태워도 좋다'고 했지만, 예술이 거기까지라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그렇다면 간밤의 격정을 담은 그림을 감정의 잿더미로부터 구해내 쓸모 있게 만드는 방법은 무얼까. 다름 아니라 지금의 색을 더없이 진하게 그려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는 일일 테다. 우리가 그림을 통해 가슴으로 맞닿을 때, 그것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일기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오지은 작가는 비어버린 것 사이를 흐르는 기억을 그리던 어제와 달리 이번엔 그것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마음을 그렸다. 작가가 꺼낸 감정의 덩어리는 본인의 구체적 기억을 지나쳐 감각으로 치환되고 다시 붓질의 방향과 물감의 두께가 된다. 붓이 움직인 흔적은 빈 잔에 남은 얼룩처럼 캔버스 위에 켜켜이 가라앉는다. 

더 무성히 자라나기 위해서는 더 농도 짙은 기억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음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늪지대 같은 기억에 잠시 주저앉을지언정 영원히 발목을 붙잡히진 않는다. 다시 일어나 어깨를 움직여 거침없이 붓을 휘두른다. 물감의 농도로 공기의 농도를 맞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웃음이 아니라 다 알면서도 여전히 해사한 웃음을 지켜내는 태도다. 뱃속에서부터 끌어 올린 물감 덩어리들, 감정의 잔해가 뒤엉킨듯한 붓의 자국이 여전히 살아있는 오늘을 말한다. 바로 지금이어야 할 수 있는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표현들이 이 회화를 클리셰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파울 클레(Paul Klee, b.1879)는,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회화라고 했다. 형상이 뚜렷하지 않은 이 그림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본다. 붓질 사이로 흐르는 마음, 물감의 냄새보다 더 진한 초록의 냄새가 감각을 자극한다. 명명되지 못했던 우리의 마음은, 오지은의 그림 앞에서 이끼가 가득 낀 숲의 냄새와 잔과 잔 사이를 휘돌며 흐르는 그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건네받으며 형상을 획득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 알지, 라는 속삭임이 오간다. 언젠가 이 그림을 끌어안고 울고 싶어지는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은 나만의 복선이 아닐 테다. 그러니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는 것이 회화일지도 모른다고, 클레의 말에 덧붙이고 싶다. 

내겐 닿지 않을 90년대 사랑 90’s love I can never reach, oil on canvas, 193.9 × 130.3cm, 2022

사랑을 통과하는 일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항상 마지막의 상처에 휘둘리느라 앞서 실존하던 진심을 잊는다. 관계의 끝에 해야 하는 것과 말아야 할 것이 무언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건 잠시라도 진실하게 과정의 사이를 메웠던 마음들이고, 중요한 건 지난 실수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내 삶이다. 

그래서 작가는 오늘의 마음으로 붓을 든다. 손목이나 팔꿈치를 까딱이는 인사가 아니라, 어깨를 움직이며 거침없이 흔드는 손이다. 네가 언제 어디서 오든 나는 이렇게 두 팔을 들고 크게 손을 흔들어 맞이하겠다고, 혹시 내게서 등을 돌린다 할지라도 멀어지는 등을 향해 또 한 번 크게 손을 흔들겠다고, 그 어느 순간도 소홀히 넘기고 싶진 않다고 붓을 움직여 말한다. 그건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내 사랑과 그 뒤를 지키는 내 삶에 대한 예의라고 말이다. 

누군가 그런 사랑은 90년대에 끝난 전설 같은 거라고 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방 작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있다. 손바닥의 살갗에 따스하게 닿는 햇볕을 느끼며 다시 오늘을 살기로 한다. 크게 들이마신 숨으로 가슴을 부풀리며 다짐해본다. 전부를 주는 것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겠다고, 무엇이 와도 괜찮으니 가장 선명한 오늘의 마음을 맞이해보겠다고,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사랑해왔다고. 

다만 사랑을 통과하기 전과 후는 분명 다르다. 붙잡은 채 놓지 않으려고 하면 함께 뒤로 밀려나지만, 통과해낸다면 쉽게 밀리지 않고 제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 그곳에는 이전보다 유연한 몸과 단단한 마음이 남는다. 그늘에서 일어나 스스로 양지로 옮기는 발걸음, 손을 뒤집어 기어이 햇볕을 받아내는 용기, 거기서부터 다시 사랑이 자라난다. 

강혜빈 시인은 산문 「사랑을 발명하는 사람」(『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 2021)에서 “나는 사랑에 관해서라면 백 행을 쓸 수 있습니다. 언젠가 백 개의 시를 모으면, 비가 쏟아졌으면 좋겠어요. 장대같이. 억수같이. 벼락같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사랑이 불현듯 깨어나도록.”이라고 썼다. 백 개의 시를, 백 장의 그림을 모아도 여전히 예고 없이 불현듯 쏟아지는 사랑을 막을 수 없다. 다만 빗속으로 뛰어들 뿐이다. 대체 사랑이 헤프지 않아야 한다면, 헤퍼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독했던 장마가 끝났다. 무거운 습기가 땅으로 내려앉았고 공기는 가벼워졌다. 수분을 품은 흙은 촉촉하고 폭신하다. 무언가 견디고 나면 새로운 것이 자라날 틈이 생긴다. 철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또 사랑이라면 좋겠다. 솟아오르는 것을 저지하고 싶지 않다. 강혜빈 시인은 같은 글에서 “사랑의 미래는 시보다 이르게 도래”한다고 했다. 마음은, 글자를 새기고 붓을 휘두르는 손보다 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며 미래에 속도를 붙이는 그림이 있다. 비는 또다시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도래할 사랑의 미래를 기다린다. 빈 잔 사이를 휘감는 진한 농도의 공기와 비에 흠뻑 젖은 땅 위를 채우며 우거지는 초록, 풍성하게 피어나는 봄꽃 사이를 가르며 통과하는 사랑. 그러니까 여기, 이토록 뜨겁게 여전히 무성하게 자라나는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