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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Jiyeon Lee, 오리 헤엄, 2020, Oil on linen, 20.2x34.3cm © Courtesy of the artist
이지연 Jiyeon Lee, 오리 헤엄, 2020, Oil on linen, 20.2x34.3cm ©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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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Jiyeon Lee, 쉬는 새2, 2020, Oil on linen, 32x41cm © Courtesy of the artist
이지연 Jiyeon Lee, 쉬는 새2, 2020, Oil on linen, 32x41cm ©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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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Jiyeon Lee, 개나리와 조팝나무1, 2020, Oil on linen, 34x53cm © Courtesy of the artist
이지연 Jiyeon Lee, 개나리와 조팝나무1, 2020, Oil on linen, 34x53cm ©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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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재 Heejae Lim, 배 A single ship, 2020, Oil on canvas, 27.3x34.8cm © Courtesy of the artist
임희재 Heejae Lim, 배 A single ship, 2020, Oil on canvas, 27.3x34.8cm ©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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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재 Heejae Lim, Untitled, 2020, Oil on canvas, 53.0x40.9cm © Courtesy of the artist
임희재 Heejae Lim, Untitled, 2020, Oil on canvas, 53.0x40.9cm ©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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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재 Heejae Lim, 모두의 건강한 삶 Everyday fresh, 2020, Oil on canvas, 162.2x112.1cm © Courtesy of the artist
임희재 Heejae Lim, 모두의 건강한 삶 Everyday fresh, 2020, Oil on canvas, 162.2x112.1cm ©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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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가 부풀어오르면 미닫이문을 여시오.
이제 정사각형의 사진으로 전시를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사진이 정확하게 그 공간을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전시를 바라보고 돌이켜보는 데에 사진 기반의 온라인 이미지는 점점 더 큰 영향을 갖게 되었다.[1] 더 나아가 온라인상에서 구현되는 여러 전시들이 생기면서, 스크린에서 작가의 작업을 보는 것이 더욱이 낯설지 않아졌다. 모든 매체가 필연적으로 사진으로 재현되기 어렵지만, 그러한 와중에 같은 평면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회화는 사진으로 재현되는 것에 대하여 다른 매체들보다 다소간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일종의 라이트 박스로 볼 수 있는 스크린이 등장하고, 그 스크린으로 이미지가 전달되면서 이제 더 나아가 사진으로 보는 회화는 재현을 너머 아예 사진으로 대체되는 것 같기도 하다. 스크린 안에서 회화를 담은 사진들은 손가락으로 미끄러지듯이 스크롤(scroll)을 내리면서 스쳐 지나간다. 실제 회화를 보던 움직이는 눈동자는 여기서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전시장에서 조차 회화를 보는 것은 수평수직을 맞춰 단 한 장의 사진을 찍는 렌즈이다. 이를 평면성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회화가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위기로 보아야 할까? 혹은 회화를 향해 던져보는 하나의 질문이 될 수 있을까?
이미지와 회화의 사이에서,
평면을 기반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이미지(image)와 회화(painting)의 구분이 특히나 스크린 위에서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 둘의 차이를 들여다보기 위해 그 시작점으로 어원을 살펴보자면, 이미지는 라틴어imago[상(像), 모습, 환영, 영상]와 영어 imtate[모방하다]에서 파생되었고, 회화(painting)는 pingere[그리다, 채색하다]라는 또 다른 기원을 두고 있다. 즉 하나의 환영과 같이 떠도는 것이 이미지라고 한다면 회화는 좀 더 실재적으로 색조와 붓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회화 사이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전시 《Expanded World》는 자연을 다시금 소재로 삼는다. 벽에 아로새기던 추상적인 동물 모양 역시 자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미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친 자연 이미지는 회화사에서 이미 전통적이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시대에 이르러 자연 이미지는 매끄러운 표면의 스크린을 통해서 전달되게 되었고, 특히나 본 전시의 작업과 같이 회화 매체를 통한다면 이 자연’스러움’에는 의문이 남게 된다.
이지연은 작업실 가까운 곳들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머리 속에 남는 풍경 이미지를 캔버스로 옮긴다. 사진을 찍는 것으로 머리 속에 저장을 대신하는 경우도 많지만, 말 그대로 눈에 띈 것을 머리 속으로 기억하고 작업실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옮긴다는 것은 정확하게 자연을 그대로 사생하고 재현하는 의미이기 보다는 재편집의 과정을 내포한다. 거리상으로 멀지 않은 곳들에서 거두어진 이미지는 그것 본연의 모습을 닮아 있지만, 구체적인 형상의 이미지가 보존된 것이 아니라, 작가를 통과하여 그려지면서 그것의 기원과의 연결은 희미해진다. 이 풍경 이미지는 작업실로 옮기는 발걸음에서 하나씩 조각나고 캔버스로 향하는 것이다. 이 기원이 도시 안에서 단지 몇 걸음만으로 무성히 자란 자연물을 볼 수 있는 곳, 청계천의 말미임을 떠올려본다. 도시의 중심지와 인접하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자연의 야생성과 자생력은 캔버스 크기의 차이에서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청계천에서 도시 중심부로 몇 걸음을 옮기면, 임희재가 바라보았던 또 다른 자연이 나온다. 이 자연은 그것의 시작부터가 이미 이미지를 표방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아름다운 휴가지, 신선한 목장과 같은 자연을 지시하고 있는 광고 이미지이다. 이들은 빛나는 라이트 박스에 덧씌워지거나, 매끈한 포장지에 자리잡으면서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광고의 본래 목적처럼 이 바라봄은 관람객은 의식적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무엇인가에 향하는 추동만 남긴다. 자연 이미지는 더이상 자연’스럽지’ 않게 되었지만, 이를 임희재는 다시금 캔버스로 옮긴다. 이때의 옮김은 비교적 적은 재편집의 과정을 통해 환영으로 존재하는 자연 이미지는 직시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은 빛나는 라이트 박스와 매끈한 포장지에 있었기에 캔버스의 표면에는 잔상처럼 눈부심이 남아있다.
물감의 몸짓 사이에서
두 작가의 캔버스에는 현시대에서 지시만을 목적으로 하는 환영이던 도시와의 차이에서 보이던, 자연을 소재로 삼았다. 자연 이미지가 어떠한 과정을 거처 이 캔버스로 이동했는가를 머릿속으로 추적하기보다는 캔버스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은 물감의 색조와 형체이다. 앞서 이미지와 회화의 차이에서 언급했다시피 떠도는 이미지를 회화로 붙잡으면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바로 실재적인 색조와 붓질이다. 붓질이 작가의 신체를 기반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려진 그림은 굳어진, 동결된 몸짓”이라는, “화가는…그리기의 몸짓 속에 있다는” 회화에 대한 플루서의 문구를 연상하게 한다.[2] 이와 같이 회화를 그리기의 몸짓으로 본다면, 두 작가의 캔버스 표면에 남아있는 물감의 두드러진 차이가 보일 것이다. 풀숲이 우거지고, 오디가 매달려 있고, 꽃이 있는 청계천 주변의 이미지에서 작가가 느낀 자연의 야생성과 자생력처럼, 물감들은 덧붙여지고 겹쳐진다. 두텁게 올라가는 물감들은 마치 자라나는 풀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반면, 흔히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이데아처럼 이상적인 자연을 광고하는 이미지는 캔버스로 위치를 옮기면서 그 눈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이 눈부심의 잔상은 두텁게 쌓은 물감을 다시 작가의 손으로 일일이 닦아내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닦이고, 긁혀지는 물감은 흰색의 캔버스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캔버스로 드러나는 부분을 통해서 눈부심의 근간이 어디였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부풀어오르는 캔버스의 평면
사뭇 다른 방향을 가진 물감의 몸짓은 이 전시에서 겹쳐지면서 단순히 그들의 힘이 상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캔버스 위에서 덧붙여지고 긁히면서 굳어진 물감의 몸짓은 작가가 호흡처럼 끊임없이 반복한 결과이고, 그렇기에 캔버스는 되려 녹은 유리처럼 호흡이 불어 넣어지면서 부풀어 오른다. 공통적으로 평면성을 가지고 있기에 사진과 같이 재현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둥그런 유리 표면을 빗겨 흐르는 주변 풍경들은 본 전시 작업들에서 물감으로 드러나는 자연과 유사하다. 이 전시에서는 재현의 문제에서 한걸음 옆에 서서 다시금 그 캔버스 표면의, 그 물감의 동력을 드러낸다.
고고학적으로 회화가 시작된 시점을 벽에 아로새긴 것이어서 그런지 줄곧 회화에서 ‘평면성’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그 평평한 표면은 부풀어 오른다. 평평하다고 생각했던 벽이었던 것이 다른 형태를 띄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에 지어진 스코틀랜드에 있는 성들처럼 말이다. 두꺼운 벽 사이에 틈새처럼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각기다른 작은 방들이 벽에 숨어있고, 방들이 모여 하나의 벽처럼 되는 그런 성들. 여기서 벽은 각각의 방들을 틀 지어서 지각하게 하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존재하게 된다.[3] 회화가 하나의 평면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벽 안의 방’으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감의 몸짓으로 부풀어오르고, 그렇게 해서 생긴 하나의 공간,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곳.
스크린을 잠시 오른쪽으로 밀어 거두어 보자. 밀어서 문을 연 뒤, 잊혀져 있던 그 공간에 들어간다면 캔버스에 흐르는 이미지가 물감의 몸짓으로 굳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크린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사방에서 오는 몸짓의 마찰, 곧 ‘회화’의 힘일 것이다.
김맑음 독립큐레이터
[1] 많은 전시들이 이미지화 되면서, SNS상의 이미지를 보고 그 전시의 방문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또한 이에 걸맞게 전시를 구성하는 데에 정사각형 프레임의 이미지를 고려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나아가 직접 가지 못한 전시, 보지못한 작품에 대해서 단지 몇 장의 온라인 이미지를 보고 텍스트를 쓰는 경우도 함께 결부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빌렘 플루서, 『몸짓들』, 안규철 역, 워크룸프레스, 2018, pp. 102-103.
[3] 이러한 스코트랜드의 성들의 괄목할 만한 구조는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의 연구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Fosco Lucarelli, “Walls as Rooms: British Castles and Louis Kahn,” 2012 (http://socks-studio.com/2012/04/06/walls-as-rooms-british-castles-and-louis-kahn/), 이병욱∙이장민, 「Louis I. Kahn의 건축에서 룸의 의미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연합논문집, vol. 8, no. 3, 2016, pp. 49-56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