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함진과 권순영의 《미물微物》전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두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대상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예술가에게 대상이란 무엇인가. 대상은 눈앞에 놓인 인물이나 사물, 풍경처럼 구체적인 실체일 수도 있고, 기억이나 감정, 사건과 관념처럼 형태를 지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예술가는 대상을 바라보고 경험하며 그것과 관계를 맺지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옮기지는 않는다. 현실의 대상은 작가를 통과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변형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대상을 대신하면서도 원래의 의미와 다른 언어를 획득한다. 구체적인 실체에서 출발했든 추상적인 관념에서 시작되었든, 작품은 은유적 표상을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와 접점을 만든다. 어쩌면 예술가와 대상의 본질적인 관계란 바로 이 접점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와 대상의 관계는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의 관계로 한정되지 않는다. 대상은 영감의 출발점인 동시에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예술가는 대상을 그리면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두려워하는지, 현실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다른 세계로 촉발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작품 속 대상은 현실을 재현하는 소재이면서 작가의 내면을 비추는 대리물이 된다. 결국 우리가 작품에서 마주하는 것은 대상 자체라기보다 대상과 관계 맺어 온 작가의 감각과 태도에 가깝다.
그러나 함진과 권순영의 작업에서는 작품에 앞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외부의 대상을 분명하게 지목하기 어렵다. 두 작가는 특정한 대상을 언급하기보다 작가 자신과 재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변화에 주목한다. 함진이 만드는 작은 조각과 권순영의 화면을 채우는 수많은 형상은 현실의 무엇인가를 닮았지만, 특정한 원형이나 실제의 장면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선택된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가 재료를 만지고 형상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모습을 얻은 존재들이다.
두 작가가 말하는 ‘대상의 없음’은 현실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대상들이 작가의 내부로 깊이 들어가 처음의 모습과 이름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살아오며 만난 사람과 사물, 축적된 기억과 감정, 불안과 욕망은 내면에서 서로 뒤섞이고 변형된다. 그 결과 현실을 닮았으면서도 현실에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형상들이 나타난다. 이들에게 작품은 현실의 특정 대상을 가리키는 이미지라기보다, 현실에서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무엇으로부터 구성된 하나의 세계에 가깝다.
슬라보예 지젝이 설명하는 판타지1)는 현실을 피해 들어가는 허구의 세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판타지는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조직하고 현실의 결핍과 관계 맺게 하는 내적인 장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함진과 권순영의 작업은 현실과 무관한 공상의 산물이 아니다.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은 감각과 욕망이 작가의 내부를 통과하며 해체되고 다시 배열된 결과다. 두 작가는 현실의 결핍을 제거하기보다, 그 결핍을 견디고 다룰 수 있는 판타지적 장면을 작품 안에 구축한다. 작품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현실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온전함을 잠정적으로 출현시킨다.
어린 시절 이끼를 들여다보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고 말한 함진은 그 작은 표면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상상의 세계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들여다본 이끼의 표면은 작은 식물과 흙, 미세한 생명체들이 뒤엉킨 하나의 풍경이자, 현실의 크기와 질서가 새롭게 바뀌는 세계였을 것이다. 그의 작은 조각에는 인간과 동물, 식물과 사물의 특징이 뒤섞인 수많은 존재가 등장한다. 돌연변이를 연상케하는 형상들은 서로 결합하고 변형되면서 어느 하나의 종이나 이름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낯선 생명체가 된다. 작고 연약한 몸 안에는 기이함과 유머, 실재와 허구, 잔혹함과 긍정적인 양가의 생명력이 함께 머문다.
함진에게 작은 크기는 현실의 세계를 축소하기 위한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손끝과 재료가 직접 만나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던 생명과 관계를 발생시키는 조건이다. 그의 조각은 미리 정해진 대상을 재현한 결과가 아니라 재료를 만지고 붙이며 형상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태어난 존재다. 어린 시절 들여다보았던 이끼의 작은 표면이 수많은 생명을 품은 판타지적 공간이었다면, 현재의 조각 역시 작가의 기억과 감정, 불안과 욕망이 서로 결합하고 증식하는 하나의 내밀한 생태계가 된다. 관람자는 몸을 가까이 기울여 작은 존재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현실의 시야 안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함진의 거대한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유년기에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권순영에게 내면의 이미지는 현실만큼이나 구체적인 세계였을 것이다. 그의 작은 화면에는 수많은 이미지가 빼곡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 화면은 한 번의 시선으로는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거대한 서사의 풍경이기도 하다. 화면 속 인물과 사물은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명확한 사건이나 이야기로 수렴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형상들은 현실의 크기와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나란히 놓이거나 겹쳐지고, 때로는 서로에게 스며들며 하나의 은밀한 공간을 이룬다.
권순영의 작은 화면은 어린 시절 수많은 그림을 그려 나갔던 스케치북의 크기와도 이어져 있다. 그에게 작은 스케치북은 현실을 축소해서 담는 곳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판타지적 공간이었다. 제한된 화면의 크기는 세계를 좁히는 경계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이미지가 끝없이 나타나고 확장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현재의 작은 화면 역시 작가의 내부에 오랫동안 축적된 삶의 기억과 감정, 상상과 욕망이 끊임없이 출현하고 서로 관계 맺으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장소가 된다.
그렇다고 두 작가가 보여주는 온전한 세계가 모든 결핍이 사라진 완벽한 이상향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결핍을 품은 채 그것을 견디고 다시 배열하며 만들어 낸 세계다. 작품 속 작은 존재와 이미지들은 결핍을 감추는 장식이 아니라, 결핍이 어떻게 새로운 형상과 관계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세계에는 환상적인 매혹과 함께 현실의 불안과 긴장이 남아 있다.
이 전시는 ‘특별한 대상이 없는 작품’이라는 두 작가의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대상의 부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외부의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는 대신, 작가 자신과 재료 사이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함진은 물질을 만지고 결합하며 작은 존재들을 출현시키고, 권순영은 작은 화면에 형상들을 불러들여 밀도 높은 장면을 만든다.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빈 공간이 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결핍으로부터 시작된 또 하나의 세계가 세워진다. 이 전시는 그 세계를 통해 예술이 현실의 대리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한 온전함을 잠시나마 존재하게 하는 장소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글 이정배
1)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새물결, 2013, 제1장 「현실의 토대로서의 환상」 참조; 슬라보예 지젝, 김소연·유재희 옮김, 『삐딱하게 보기: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 시각과언어, 1995, 제1장 참조.
권순영(Kwon, Soon-young, b.1975)은 단국대학교 동양학과와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개인전으로는 《유령의 딸》(더소소, 서울, 2023), 《눈물의 여정》(갤러리 소소, 파주, 2017), 《슬픈모유》(갤러리 팩토리, 서울, 2014), 《뭇웃음》(갤러리 팩토리, 서울, 2011), 《Flashback》(관훈갤러리, 서울, 2007)이 있으며, 주요 단체전으로는 《밤을 넘는 아이들》(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 2021), 《현대회화의 모험: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19), 《스틸엑츠》(아트선재, 서울, 2016), 《무진기행》(금호미술관, 서울, 2016)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함진(Ham Jin, b.1978)은 경원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였으며, 주요 개인전으로는 《MICROmegas》(Dohyang Lee Gallery, 파리, 2026), 《엄마》(페리지갤러리, 서울, 2022), 《Head》(챕터투, 서울, 2020), 《클로즈-업》(두산갤러리, 서울, 2014), 《함진》(PKM갤러리, 서울, 2011), 《애완》(PKM 갤러리, 서울, 2004), 《공상일기》(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서울, 1999)가 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오~감각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6), 《내게 다정한사람》(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4), 《모든 섬은 산이다/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30주년 특별전시》(한국문화예술위원회, 베니스, 2024), 《Maniera》(두산갤러리, 서울, 2023), 《예술만큼 추한》(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 2017), 《한국미술: 대항해 시대를 열다》(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3)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챕터투 레지던시(2019), 두산 레지던시 뉴욕(2013), 캔 파운데이션 레지던시(베를린, 2012) 등 입주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