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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ujin


2021.11.10(수) - 11.30(화)​





불안과 안정 사이, 매체와 매체 사이

김시습


회화를 작업의 주된 매체로 삼는 작가인 이수진은 자신의 그림을 주로 불안이라는 키워드 주변에 위치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안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불안이나 공포를 유발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그림 속에 자주 나타나긴 하지만, 그 불안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까지 전달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작은 크기나 회색조의 건조한 톤, 두텁지 않은 붓질 등으로 인해 감정이 매우 절제되어 있다. 때문에 보는 사람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기보다는 그려진 내용과는 반대로 오히려 귀엽거나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수진의 그림을 불안이라는 심리와 연결한다면, 이는 작가 자신이 불안을 다스리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수진은 그림을 통해 실제였다면 두려움이나 불안을 유발했을 상황이나 장면을 사소하거나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지난 개인전의 제목 «불안에 맞서는 기술»(2020, 더 그레잇 컬렉션)은 작가의 이러한 회화 제작 과정을 지시하는 말로 여겨진다. 작가의 작업 과정이 종종 (많은 경우 작가 자신에 의해) 수행의 과정이라 언급되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수진이 자신의 작업 과정을 불안에 맞서는 과정이라 칭하는 것은 흥미롭다. 반복되는 작업을 통해 불안에 맞서는 행위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수행의 일종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수행에 비해 훨씬 더 세속적이고 솔직한 감정들을 상기시킨다.

불안의 요소는 일상에 산재해 있다는 점에서 불안이란 내가 세상을 등지거나 떠나기 전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에 맞선다는 것은 수행처럼 나를 점점 고양시키는 일이 아니다. 이보다는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나를 빗겨 지나가는 재난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서둘러 지워버리고 태연한 듯 그 다음 시퀀스를 나의 삶에 이어붙이는,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이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기억 내 편집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자동차사고(불에타는) Car Accident(burning)

2021, oil on linen, 22×27.3cm

이번 전시 «고스트 이미지»에서 작가는 불안이라는 주제에 대한 기존의 관심을 이어가는 한편으로 지난 개인전 이래로 시작한 새로운 실험의 결과를 선보인다. 그 실험이란 바로 영화의 장면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 것이다. 작가는 주로 공포나 스릴러 등의 장르로 분류되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장면을 차용하고 변주하여 그림으로 옮겨 그렸다.


선택된 장면은 보통 불안한 심리 상태를 표현하거나 불안과 관련된 본인의 경험이나 상황을 환기시키는 장면이지만 선택에 어떤 분명한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작가는 장면의 상징성을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한다. 작품을 보고 그것이 어떤 영화에서 차용된 것인지를 알아맞힐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하여 그림은 친근함과 낯섦이라는 반대되는 느낌을 동시에 가진다.

작가의 이러한 실험은 그림 속 이미지의 파편성이나 산만함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산재한 불안에 맞선다는 행위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주인없는 셔츠 Unattended Shirt

2021, oil on linen, 53×45.5cm

  여기저기 흩어져 잠복해 있는 불안의 모습을 상기시키듯 그림 속의 이미지는 이제 특정한 하나의 서사 속에서는 결코 봉합되지 않은 채 애매하고 어렴풋한 분위기만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동차 사고(벽을 뚫은)>(2021), <자동차 사고(물에 빠지는)>(2021), <자동차 사고(떨어지는)>(2021), <자동차 사고(불에 타는)>(2021), <자동차 사고(뒤집어지는)>(2021)는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 사고를 나열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연작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나열한 순서대로 각각 <비틀쥬스>, <빌어먹을 세상 따위 시즌 1>, <이블 데드 3 – 암흑의 군단>, <내가 사는 피부>, <파고>에서 빌려온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표현이 최소화된 상태로 반복적으로 묘사된 맥락이 모두 다른 다섯 개의 자동차 사고 장면을 그린 그림의 병치 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개별 사고의 내용과 의미보다는 오히려 현실 속에서 사고가 반복되는 형식 자체라 말해야 할 것 같다.

<“갤러리에 연장해달라고 전화할까?”>(2021), <“계속 작업해”>(2021), <기다리는 붓>(2021)은 모두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유전>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작가가 다소 변형하여 그린 것이다. 역시 영화 속에서는 너무나 사소하게 지나가는 장면을 옮겨 그린 것이므로 그 컨텍스트가 의미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전시를 준비하며 시달렸을 작가 자신의 불안 강박이 떠올라 보는 이를 웃음 짓게 만든다.

최면 Hypnosis, 2021, oil on linen, 22×27.3cm 

전시 제목 «고스트 이미지»는 마치 유령의 모습처럼 상상의 틈 사이로 문득 얼굴을 내미는 불안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작가가 고른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주로 매체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이 말의 또 다른 쓰임 또한 이수진의 회화를 설명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인 방식으로 포착된 대상이 아닌, 화면과 화면 속 이미지 사이에 끼어 있는 이물질과도 같은 잔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부적절한 전파의 수신으로 인해 텔레비전 등의 화면에 이미지가 다중으로 겹쳐져 나타나는 현상을 고스트 현상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불안과 안정 사이, 그리고 매체와 매체 사이에 끼어 있는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수진이 화폭에 담은 이미지를 고스트 이미지라 부르는 것에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불안이라는 주제에 대한 탐구가 정상적 삶의 안정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수진의 그림은 회화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정상적 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고스트 이미지는 현실과 이미지로 양분되는 두 세계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지시한다. 이미지가 현실과의 정상적 네트워크 속에서 성립하는 하나의 생태계 안에 존재한다면, 고스트 이미지는 그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생태계 자체의 자의성을 다소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허구인 이미지를 대신하여 실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의 세계를 또 다른 형식으로 재조합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라르고 Largo, 2021, oil on linen, 22×27.3cm 

흰 컵 White Mug

2021, oil on linen, 24.2×33.4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