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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Lagrangian Point


박석민·지근욱


2022.12.29(목) - 2023.01.23(토)





◇ 지근욱 작가의 개인전 <잔상의 간격>(2021)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작업 과정에서 길을 잃거나 실수에 직면할 경우 어떻게 해결하는가. 작가와 멀지 않은 관계였기에 즉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점 이후 다양한 변수들과 조우해가며 결과에 도달하는 나로서 그의 대답은 어떤 이유에서 흥미로웠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Ted Chiang)라는 SF소설의 한 부분이 직관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소설에 시작점과 도착점 사이의 빛의 이동경로 그리고 빛 스스로의 의지에 관한 설명들이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내게 매 순간의 가능성을 돌파해나가는 어느 화가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두 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이와 s 혹은 w의 궤적을 그리며 결과에 도달하는 또 다른 이. 정반대의 경로를 짚어 나가는 두 사람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소설을 함께 읽은 후 1년간 나누었던 언어, 그림, 의지와 결과물, 시작점과 도착점 사이의 확정적/ 불확정적 경로에 관한 대화들로 전시의 실마리가 구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두 작가의 비교/ 대립항으로부터 작가와 작품 간의 관계는 필연적인가 하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각자의 작업을 재정립하는 시기를 맞이하며, 그간의 대화들은 연대와 탈주에 관한 어떤 쌍곡선을 그리게 될까.

박석민

Milky route 006

2022, 50×35cm, Acrylic spray on canvas

◇ 작업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지점까지 그 경로가 사전에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면 과정에서 마주하는 다른 선택지를 얼마나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박석민 작가의 질문이 전시의 시작점이었다. 실제로 본인이 진행하는 작업은 인과적인 순서가 점점 분명해지는 궤적을 그려가고 있었고 화면의 선분들 또한 목표 지점을 향한 최단 경로에 적응하고 있기도 했다. 작업이 지나치게 선형적인 궤도에 수렴하고 있다고 인식할 즈음 박석민 작가와 빛의 경로, 의지와 결과 등에 관한 생각들을 공유했다. 서로의 작업은 전혀 다른 특질들을 가졌지만 현상의 이면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회화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라그랑주 포인트를 떠올린 것은 병치의 형태를 통해 보다 총체적인 공명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라그랑주 포인트는 우주 공간에서 두 개의 천체 사이에 존재하는 특정한 점(정확히는 특정한 궤도)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인공위성 따위의 물체들은 천체들의 중력으로부터 일종의 자유를 부여받고 스스로의 궤도를 형성할 수 있다. 두 작가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장면, 서로에게 다가서면서도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그림을 상상했다. 작은 합의와 협업의 과정이 예상하지 못한 경로, 변수, 형태를 수용하고 현재의 문제의식에 접근하는 실천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박석민

Milky route 007

2022, 50×60cm, Acrylic spray on canvas

◆ '현재'라는 미지의 대상에 접근하고자 사유를 향한 '바라보기'의 형식을 제안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것은 그림과 감상자 사이에 일종의 비물질적인 커튼을 설정, 세계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태도이다. 최근 회화의 정서와 불협화음을 내는 대상들을 다루며 감상자의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일련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각자가 속도를 달리하는 회화적 사건들과 제어되지 않은 무의식의 접점을 가시화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예술의 재정의에 관한 필요가 가속화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들과 접촉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내가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기화된 경험의 세계는 지근욱 작가의 화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경험적 우주와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시선과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망막의 이슈를 확장하려 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접근하는 통로를 전시/전시공간의 동(사)적 맥락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함께 고민했다. 1mm가 채 되지 않는 두께의 얼룩들이 지시하는 바라보기의 조건들이 정신적/육체적 태도에 관한 현재적인 질문들로 수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근욱

Frequency C3 - 002

2022, 50x50cm, Acrylic and Colored Pencil on Canvas

◆ 모래알 하나를 집어 부스러뜨리는 악력처럼 직관적으로 감각하기 어려운 작은 저항의 힘들을 상상하곤 했다. 이는 신체의 감각 수용체가 눈을 감고도 팔을 어디로 뻗었는지,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대상이 없는 이미지가 특정한 외연을 가지고 원래 그렇게 존재하듯 실체화 하려는 회화적 의지로 이어졌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그 의지의 시작점에 다시 서서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에 가변성을 배치하는 형태로 구상되었다. 스트로크 기저에 부피를 이루는 면의 영역은 최초의 의지와 맞닿아 있는 선의 배열을 어긋나게 하는 장치이자 박석민 작가의 분진적인 물성과 모서리의 연결을 이루는 요소이다. 또한 거시적인 표면과의 제로베이스의 중간상태를 차지하는 점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는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형상의 또렷함이 부각되는 조형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박석민 작가의 용해된 세계와는 반대의 지점을 향하고 있지만 같은 시공간에 놓이게 되는 사건으로 인해 그 시각적 필연성은 더욱 선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근욱

Frequency C3 - 004

2022, 50x100cm, Acrylic and Colored Pencil on Canvas

◈ 가볍고 비물질적이며 동적인 이미지를 지향한다는 공통분모에 더해서 선/면, 내부/외부, 경험/비경험이라는 차이점을 동시에 드러내는 방식에 관해 논의했다. 그 결과 각자의 작업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적절한 거리를 제시하면서 형식상의 구분(크기, 구성)을 최소화하기로 합의했다. 전체 전시공간에는 레퍼런스가 된 소설 속 '빛이 수면을 지나가는 경로'의 이미지을 이식하고자 했다. 전시장 전면의 유리구조물을 세로로 전환된 수면으로 설정, 빛이 진행해 나아가는 찰나의 시간을 두 작가의 평행한 그림들로부터 감각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공동작업과 개별 작업에서의 주된 아이디어는 그림들이 서로의 모서리를 공유하도록 프레임의 구조를 설정한다는 것이었다. 지근욱 작가의 작업은 그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본인의 작업은 멀어질수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특성을 가진다. (가상의)거대한 조형의 칼날이 지나간 단면을 직선/곡선의 모서리와 일치시키고, 이를 기준점으로 활용함으로써 각자의 작업들이 반대방향으로 가시화하는 동적 에너지를 증폭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지근욱

Frequency C3 - 006

2022, 50x50cm, Acrylic and Colored Pencil on Canvas

◈ 사건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 실제로 대화가 행해지는 것처럼 두 작가의 작업은 모양이 다른 각자의 언어로 표의적 대화를 이끌어낸다. '가변적 경로'의 맥락에서 전시공간은 촉매에 따라서 원소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 입자의 상태, 즉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느슨한 공기가 맴돌기를 원했지만, 온도의 낙차가 중간 값으로 수렴하도록 하는 방식은 배제했다. 또한 라그랑주 포인트가 주는 감상처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적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특정 시야에서는 초점이 흐트러지며 시간적 간극까지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 사건의 가장 마지막인 타원의 모서리를 공유하는 공동작업은 수면의 설정과 더불어 전시 구성의 가장 첫 단계에서 합의한 부분이었다. 수평적 진행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타원은 동적인 심상을 극대화 하기위한 형태이며 개별 작업들과는 달리 안에서 밖으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이동하는 속도의 감상이 선재하게끔 방사형 모양을 띠도록 사전에 논의했다.